제149집: 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 1986년 11월 23일, 한국 본부교회 Page #224 Search Speeches

하나님은 본래의 나

이렇게 볼 때에, 아담 해와가 성숙했더라면 어떻게 됐겠어요? 이 성숙이란 말은 아까 말했듯이 수직상에서 한 포인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왔으니, 내려온 것은 연장되어야 돼요. 자녀를 통해서 연장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각형, 사위기대를 중심삼은 완성체를 만들어 가지고 비로소 조화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도 좋고 할머니도 좋고, 그 시대가 지나가면 어머니 아버지 시대, 그다음 아들딸의 시대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시대로….

그 사위기대, 천륜을 중심삼고 어머니가 기뻐할 때 아버지가 기뻐해야 되고, 그다음에는 아들딸이 기뻐해야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딸 낳아 가지고 키워서 그들이 자식을 낳게 될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손자들을 대해 가지고 지극히 정성을 다한다 이겁니다. 옛날에 자기 아들딸을 기르던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같은 마음을 느끼면서 내 아들의 2세라는 생각을 갖지 않고 자기 아들딸을 사랑하던 마음에 연장된 마음을 가지고 손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의 아름다움이요, 그것이 사랑으로 미화된 기반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본래 하나님은 누구냐? 하나님은 본래 나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누구냐 할 때 '하나님이 누구긴 누구야, 하나님이지' 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래 나입니다. 나는 무슨 나? 내 마음에 있는 나예요.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의 주인이지요? 마음을 속이고 뭐 할 수 있어요? 마음 속이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래 누구라구요? 「나요」 깊은 가운데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마는 있다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축을 중심삼고 돌고 있지만, 축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중앙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라구요, 가만히 있으니까, 한자리에. 그러나 옆의 것들은 도는 것을 다 안다는 겁니다. 안 그래요? 딴 것은 다 사방으로 돌아가지마는 축은 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른다는 거예요. 모르고 있지만, 마음 깊은 가운데 하나님의 한 면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멀어요, 가까와요? 「가까와요」 얼마나 가까와요? 제일 가깝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렇게 느낀 자리에서 신앙을 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냐? 오늘날 기성교회식으로 말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은 거룩한 것이고 인간은 속된 것' 그럽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이 뭐예요? 어떻게 만나겠어요? 하나님이 뭣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고, 우리는 뭣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거예요? 만남의 기반이 없다면 그건 논리적 모순입니다. 논리적 모순이예요. 그런 시대는 다 지나갔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 중의 나다' 할 때에 자기가 도망가서 숨어 있을 때 자기 혼자 가 있지만 자기가 숨어 있다고 생각해요? 어디,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숨기는 뭘 숨어, 같이 있는 것인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전부 다 힘의 작용을 느끼기 때문에 '이것 안 되겠구나. 저기 가야 할 텐데…' 하는 이런다는 것입니다. 그래 나쁜 죄를 지어 가지고 말이예요, 어디 가 숨어 있어도 '이 자식아 넌 저기 가야지, 안 된다' 하는 이런 힘이 작용하는 겁니다. 저기 가야 된다는 거예요. 기분이 좋아요? 「예」

그러면 하나님과 뭐 그다음에는 뭐예요? 하나님의 아들딸, 하나님의 자녀와 뭐예요? 응? 「……」 아니, 오늘 제목이 뭐예요? 「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 자녀와 뭐? 「안식하소서」 안식처. 만나지도 않고서 안식할 수 있어요? 안식처는 생활하다가 언제나 마음대로 쉴 수 있는 곳입니다. 마음대로 쉴 수 있는 곳이예요. 그래 여러분의 마음이 마음대로 쉬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마음대로 쉬게 되어 있어요? 몸뚱이가 완전히 하나되어 있지 않으면 안 돼요. 하나님이 '삥―!' 몰려 나가는 거예요. 그건 자연적 작용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매일 찾는다 해서 하나님이 '내가 네 집에 들어가 있겠다' 하겠어요? 그건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지 않은 그 자리는, 그 마음의 뿌리는 얕은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절대적으로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나는 양심적이다' 할 때 그건 뭐냐? 하나님 대신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우리의 인생에 있어 모든 양심적 규정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한, 그 논리 체제에 맞는 정의를 세워 놓아야 돼요.

그러니 모두가 하나님과 가까운 '나'라야 합니다. 동(東)에 있는 사람은 어때요? 동에 있는 사람은 '아이고 서(西)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하나님과 더 가깝다' 그럴 수 있어요? 동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서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생각할 때에 나 혼자와 있는 하나님보다도 열 사람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힘이 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합하면 흥하는 것이요, 분리되면 망하는 겁니다. 왜 망하느냐? 하나님이 떠나기 때문입니다. 합하면 하나님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 모든 것은 언제나 논리적인 기원을 추구해야 돼요.

그래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와요? 얼마나 가까울까요? 너무 가깝기 때문에 모릅니다. 여러분, 눈에 이거 보여요? (시늉해 보이시며 말씀하심. 웃음) 초점이 맞아야 보이는 거예요. 너무 가까운 자리에선 안 돼요. 초점이 맞을 때가 언제냐? 소리를 낼 때도 숨과 초점이 맞아야 '맴맴' 콧소리가 안 나는 거예요. 초점이 맞아야 돼요. 하나님과 인간과 초점이 맞아 가지고, 몸과 마음이 초점이 맞아 가지고 하나님이 '땡' 하면 우리 몸뚱이도 '땡' 해야 됩니다. 대답해 줘야 된다구요. '땅' 치면 에밀레종같이 '워워워워워워워' 울려야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까운 거예요? 하나님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천도교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거 해석을 바로 못 해서 그렇지, 맞긴 맞는 말이예요. 예수님이 말하기를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왜? 천국은 하나님이 들어가 계시는 곳으로, 모든 곳에 천국이 이루어져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들어와 있는 본궁이 곧 내 마음입니다.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