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집: 회고와 현재 1970년 12월 2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93 Search Speeches

오늘의 기쁨을 미래의 기쁨으로 남길 수 있" 사람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여기에 합당한 전통적 사상이나 정신적인 뒷받침을 가진 문화와 문명권이 있었느냐? 지금까지 그러한 문화와 문명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적인 사상이나 정신적인 뒷받침을 가지지 못한 문명권은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흘러가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통일사상으로 말미암은 이런 사상적 뒷받침, 즉 전체의 공익을 위하고 전체의 공의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기쁨을 전체의 가치에 결부시키기 위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계와 더불어 생명을 다짐하고, 세계와 더불어 인연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주장을 가지고 나아가는 새로운 문명권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문화가 창건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문명권은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역사를 빛내고 찬란한 문화를 자랑할 수 있었던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새롭고 입체적인 문화권을 계승, 상속시킬 수 있는 문명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은 잘살아야 되겠다, 잘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잘살고 잘되어야 되겠다는 것이 김씨면 김씨를 중심삼은 어느 가정의 울타리권내에서 잘살아야 되겠다, 잘되어야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세계권내에 있어서 잘되어야 되고 잘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것과는 천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과거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이요, 후자는 미래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한계권내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오늘만의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일과 맞부딪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쁨은 내일이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쁨을 오늘의 기쁨으로만 지내 버릴 것이 아니라, 오늘의 기쁨을 미래에 남길 수 있도록 지니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무한한 가치를 지닐 것입니다.

그런 사상, 자기를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로 한 승리의 정상을 추구하는 사상을 지니고 하늘땅과, 과거에 왔다 간 영인들과, 현재의 인류와, 미래의 후손들이 공히 쌍수를 들어 이곳은 세계적인 정상이요 세계 만민이 기뻐할 수 있는 봄날을 맞고 있는 곳이라고 찬양할수 있는 그런 곳을 바라고 나간다 할진대는, 오늘날의 삶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고통은 정상을 극복하고, 정상을 점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겠느냐. 정상을 결정할 수 있는 하나의 재료로 남길 수 있는 생활은 그 누구도 점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보다 귀하냐 할 때, 자기를 위주로 하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로 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어느 역사시대를 통하여서도 그러한 한때를 들어 자랑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랑하고 싶으신 한때는 어떤 때일 것이냐?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박사들이 와서 유향을 드리고 경배드리던 기쁨이나 혹은 천군천사가 기뻐하던 그 기쁨은 탄생의 기쁨은 될는지 모르지만 위업 상속의 기쁨은 못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창조의 위업을 완결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에 충만하시고, 만천하 피조세계가 호응하고 동조하는 찬양과 경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며 출발하는 데 있어서의 찬양과 경배였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출발을 통하여 과정을 거쳐 가지고 미래의 기쁨을 다짐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출발하는 자리에서의 기쁨이었지, 미래의 목적을 이룬 세계적인 정상에 있어서의 기쁨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라던 예수님을 맞아 기쁨으로 출발했지만 출발했던 목적을 지니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비참한 운명이 남아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역사에 두 번 다시 없는 슬픔을 가중시킨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말미암아 아담 해와의 타락 때보다도 더 큰 슬픔 곡절에 부딪치셨기 때문에 그 아득함을 세 시간 동안의 어둠으로 나타내셨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인 정상으로 남기고 싶었던 그 소원을 기필코 이루셔야 하셨기에 어느 한때 어느 한 곳에서 한 분을 중심삼고 결정지어야 할 것을 다짐하시고 지금까지 수천년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를 양육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난의 대가로 찾아진 기독교요, 수난의 역사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기독교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를 믿는 신자 가운데에 수난의 역사를 장식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으며, 수난의 대가로 찾을 수 있는 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