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집: 여성시대와 세계섭리 1994년 06월 19일, 한국 한남동 공관 Page #201 Search Speeches

자기와 하나되어 있" 것은 느끼지 못해

사랑이라는 것은 혼자 느낄 수 없습니다. 혼자 느낄 수 없어요. 여러분은 다 사랑을 갖고 있지요? 사랑을 갖고 있지만 그 사랑은 혼자 못 느껴요.

또 생명을 갖고 있지만 못 느낍니다. 그 다음에 양심을 갖고 있지만, 가만히 있을 때는 양심이 작용을 안 합니다. 못 느껴요. 이것은 상대가 나타날 때 모든 것이 백 퍼센트 자극과 흥분을 촉진화시키는 것입니다. 상대가 없으면 그냥 그대로 못 느끼는 거예요. 이게 하나되어 있으면 느끼질 못해요. 이런 말이 나와요. 이건 이상한 말이지만 말이에요.

우리가 이 눈에 점점 가까이 하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눈이 깜박깜박하는 것을 하루에 몇천 번 하는데, 감을 때는 어두웠다가 뜰 때는 밝았다, 밝았다 어두웠다 그렇게 의식을 해요? 하루종일 해도 모른다구요. 거 왜 모르느냐 이거예요. 안 그래요?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면, 감기가 걸려서 기침을 하면 가래가 나오는데 그 가래가 얼마나 더러워요. 옆 사람한테서 나온 가래는 보기 싫어서 대번에 휴지로 씻어 버리는데 말이에요, 자기 가래는 더러운 줄 모르고 삼켜 버린다구요. 안 삼켜요? (웃음) 삼킬 때가 있지요. 더러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 삼켜야지요. 삼킨다는 것 자체는 뭐냐? 자기 것은 왜 더러운 것을 못 느끼고 삼키느냐 이거예요. 그것은 하나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얘기해서 안됐지만 말이에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코 막고 뒤를 보는 사람 봤어요? 여기 선생님들 그렇게 해봤어요? 그러지 않고 '흥흥, 오늘 아침에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해서 감정을 한다구요. 그게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자기와 하나됐기 때문에 더럽지 않다 그거예요.

우리 몸의 여기 한 자 아래에는 무슨 공장이 있다구요. 변 공장이 있다 이거예요. 그것 알아요? 사실 여기에 한 보자기 쌓아 놔 가지고 변을 만드는 공장이 있습니다. 여러분 맛있다 맛있다 하며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 것이 뭐냐? 여기 변 공장에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거예요. (웃음)

그것을 생각하면 신경질적인 여자는 밥 먹던 것을 전부 다 먹지 않고 버텨 가지고 굶어 죽을 수 있는 이런 놀음인데, 왜 한 자 아래에 있는 더러운 걸 몰라요? 하나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겠어요?「예.」이런 논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돼 있으면 몰라요.

우리 눈이 자기를 보기 위해 생겨난 게 아닙니다. 코가 자기를 맡기 위해 생겨난 게 아니예요. 입이 자기에게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게 전부 다 상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지금 생겨난 모든 필요요소라는 것은 내 자체를 위한 필요요소가 아니예요. 그 필요요소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필요로 합니다. 오관이라는 것이 자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그 필요한 것을 느끼는 그 도수에 따라서 나와 상관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묘하게 돼 있다구요.

그러면 만일 그것을 안다면 어떻게 되느냐? 사랑이 다 있고 생명이 다 있는데, 사랑을 봤어요? 사랑을 만져 봤어요? 생명을 봤어요? 생명체는 봤지만 못 만져 봤다는 것입니다. 양심을 봤어요? 못 봤어요. 만져 봤어요? 못 만져 봤습니다. 그런데 있는 걸 어떻게 알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봤어요? 못 봤습니다. 하나님을 못 만져 봤다구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상대가 안 나타날 때는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돼 있을 때는 못 느끼는 것입니다.

또 그것 가지고 실감이 안 나면 여러분 바른손을 여기에 대 봐요. 심장이 '쿵쿵쿵쿵!' 합니다. 청진기를 갖다 대면 폭탄 터지는 소리 같다구요. 그것을 왜 못 느껴요? 느껴요, 못 느껴요? 하루에 몇 번 느껴요, 여기 박사님? 계속해서 1분에 72번씩 움직이니까 하루에 몇만 번을 움직이는데, 하루에 몇 번씩 느껴 봐요?「손을 갖다 대야….」그러니까 못 느낀다는 말 아니예요? (웃음) 왜 모르느냐 이거예요. 여기의 머리카락 하나만 까딱 해도 아는데, 그 머리카락 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해서 발길질같이 왁 왁 하는데 모르지 않아요? 거 왜 그러냐? 완전히 하나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는 처음 듣는 발상이고,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게 왜 그래야 되느냐? 내가 사랑을 만약에 30퍼센트를 갖고 있다면 백 퍼센트 사랑의 상대가 나타날 때는 30퍼센트가 감소하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가 30퍼센트 감소하고 70퍼센트밖에 못 느낍니다. 그런 사랑은 누구나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 퍼센트 이상 느끼기 위해서는 완전히 몰라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다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만족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러니까. 이런 논리에 있어서 하나님도 혼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 얼마나 적적하겠어요? 그러니까 느낄 수 있는 이런 사랑의 대상, 생명의 충격, 생명의 자극을 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부처(夫妻)끼리 살면서 서로 낙심할 때 격려하지 않아요? 생명에 자극을 줘 가지고 폭발적인 흥분을 시킬 수 있는 이런 대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양심도 가만히 있는데, 비양심적 혹은 또 더 높은 양심이 있으면 내가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 자체가 백 퍼센트 이상 상대를 느끼기 위해서 내가 알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런 원칙에 있어서 사랑도 갖고 있고, 생명도 갖고 있고, 그 다음에 혈통적 근원이 되고, 양심적 근원이 되어 있는데, 혼자 가만히 있으면 못 느끼는 거예요. 이걸 느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 상대로서 이 모든 피조만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