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집: 뜻을 대하는 우리들 1972년 08월 1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35 Search Speeches

하나님 이상으로 눈물을 흘려 보자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느냐? 하나님의 슬픔을 대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느냐? 어떠한 가정에 있어서 아들이 있다면 그 중에 맏아들이 부모를 대해서 가슴 아프게 할 때, 나이 어린 동생이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그 형으로 인해 슬퍼하는 부모 앞에서 흐느껴 울면서 '어머니 아버지, 형을 때리기 전에 저를 때려 주시고, 형을 욕하기 전에 저도 그럴 수 있으니 그렇게 되지 말라고 저에게 채찍질해 주십시오' 하는 아들이 있다면, 부모는 거기에서부터 아픈 마음을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나오지, 그 이하에서는 나올 수 없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소원 성취가 어디서부터 시작될 것이냐? 일이 아닙니다. 돈이 아닙니다. 나라가 아닙니다. 심정입니다, 심정.

아담 해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슬펐겠느냐, 그 이상 슬퍼할 수 있는 내가 되자는 거예요. 쫓아낸 하나님이 극복할 수 없는 경지의 슬픔이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극복할 수 없는 그 슬픔을 가지고 아들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게 왜 자극을 못 시켰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무엇이냐 하면, 아담 이상 내가 눈물을 흘려 봤느냐는 겁니다. 아담을 대하던 하나님 이상으로 눈물을 흘려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 새로운 복음의 길이요, 새로운 부활의 길이요, 새로운 소망의 출발의 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므로 아담 이상으로 울어 보자는 거예요. 누구를 위하여 우느냐? 자기를 위해서 우는 것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울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어 있습니다. 뜻을 위하여 울라고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각한 자리에 선 예수와 제자되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 종자가 달랐다는 겁니다. 편안히 잠잘 수 있는 제자와 생명을 내놓고 몸부림쳐야 하는 예수는 입장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심정이 달랐다는 거예요. 밤을 새운 모습은 비슷했지만 내용이 달랐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의 뜻을 대하는 내가 되어야겠고,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그러한 심정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120년 동안 수난길에서도 하늘을 위한 노력을 계속적으로 가중하던 노아의 인격을 바라면서 그 이상 더 어려운 자리에 들어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노아 할아버지가 '이제 그만 하소' 할 수 있는 자리, 하나님까지도 '야, 너 이제 그만 해도 된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더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면, 뭐 이런 하나님이 있느냐고 하면서 뿌리치고 가는 사람이 있다 할 때,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냐? 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효자가 가는 길을 막고 '이 자식아, 이제 그만 해도 된다' 할 때, '어머니 아버지, 저는 이렇게 해야만 됩니다, 이것을 위해 태어났고 이것을 위해 죽어야 됩니다' 하면서, 효의 길을 막는 부모를 밀어 제치고 간다고 해서 불효되는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왕이 가지 말라고 하더라도 군왕에게 항거 하면서, 군왕을 밀어 제치고 죽음을 각오하고 군왕을 위해 간다고 해서 역적이 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법세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심판이니, 무슨 법률을 통해 치리하는 세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심정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기도와 선생님이 하는 기도는 다릅니다. 달라요. '아버지' 하는 그 말은 같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