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집: 탕감노정과 아벨의 희생 1987년 10월 29일, 한국 한남동 공관 Page #107 Search Speeches

흥진군이 희생될 때의 시대적 상황

통일교회하고, 승공연합하고, 그다음에는 국민연합하고, 카프하고 기관장, 통일교회 기관장들인가? 「기업체장입니다」 기업체장. 아 글쎄. 장(長)이라는 사람들이구만. 「대표(어머님)」 장이 대표지 뭐. 「대표 인물(어머님)」 가만 보니까…. 몇 사람인가? 「백 명 정도 됩니다」 백 명.

나 하나 물어 보자구요. 여기에서 `나에게 도(道)를 맡기면, 도지사를 시켜 주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아 박의원은 그만두고. (웃음) `내가 하게 되면 어떠한 도지사보다도 틀림없이 공산당 뿌리를 빼 버리고 싹싹 잘라 버릴 텐데…' 하는 사람, 자기가 그렇게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그래, 어떻게? 일어서서 얘기해 봐. 어떻게 할 거야? (웃음) 어떻게 할 거야? 일어서서 얘기해 봐. 왜 웃어요? 조그맣고 얼굴도 변변치 않은 사람이 섰다고 웃나요? 사람 작다고 얕보지 말라구요. 말을 들어 봐야 알지. 안 하려면 그만둬요. (웃음) 말할 재료가 없으니까 인사하면서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는구만. (웃음) 왜 웃소?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청년부장 노학우씨가 자신의 결의를 피력함)

그러니까 도뿐만 아니라 한 나라를 맡겨 주어도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다 그 말이구만. 「예」 거 좀 간단히 얘기하지. 「박수 좀 치지요(어머님)」 (박수)

오늘은 이런 모임을 위해서 이렇게 모였으니 다른 데 시간 약속한 거 없겠지요? 바쁜 사람 있어요? 없겠지요. 오늘은 시간을 좀 넉넉히 잡자구요.

이제, 무슨 흥진님 하던데, 흥진님이 누구든가? 곽목사, 나와서 흥진이에 대해서 얘기 좀 하지. 여기에 흥진님이 누구냐 하고 모르는 사람 없겠지요? 흥진이가 그때 뭐라고 할까, 급변을 당해 가지고 영계에 갔는데, 그때가 전환시기였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우리 통일교회와 맞서 가지고 하나되어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전세계가, 72개 국이 합한 것입니다. 72개 국이 선생님과 합해 가지고 전국가 앞에 일대, 뭐라고 할까, 섭리로 볼 때 하나의 제압적인 계기를 설정한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재미있는 것이…. 여러분이 북괴에 대해서 알아야 됩니다. 북괴가 나에 대해서 제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거예요. KGB도 마찬가지고. 그러니만큼 레버런 문의 발판, 문총재의 발판이 이 남한세계에 확장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제일 염려했던 것이 기도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전라남도 광주집회(1983년 12월 23일, 승공궐기대회)가 문제였습니다. 광주집회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 명령을 했어요. 광주에서 집회할 때는 초만원, 일단 들어오면 서서 움직이지 못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을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일어서서 한 발짝도 못 가는 환경을 만들어야 되었던 때라는 것입니다. 그때 바깥에도 아마 5, 6만 명은 모였지요? 이래 가지고 난장판이 벌어지고 다 이럴 때, 바로 그 시간에 흥진이한테 교통사고가 난 것입니다.

한국과 통일교회와 선생님의 승리가 그래요. 그때를 보면 한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한국이 통일교회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통일교회가 반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축복가정들이 선생님과 완전히 하나 안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된다고 했지만 전체적인 비율을 볼 때 하나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청산지어 가지고 하나된 자리로 이어 나가지 않고는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1983년과 1984년은 일대 격돌기로 향하는 거예요. 격돌기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 큰 암초에 부딪치느냐 안 부딪치느냐 하는 이런 세계사적인 흐름이 거쳐 나가는 때였습니다. 어디까지나 한국의 기지에서 방향을 돌리지 않고는 세계로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로 들어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