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집: 신의 섭리노정과 인간의 생활노정 1987년 01월 11일, 미국 Page #113 Search Speeches

하나님을 해방해 "려야 할 우리의 생활노정

자, 하나님의 섭리노정과 인간 생활노정인데, 여러분의 하루 생활노정에 있어서 그 생활이 본심이 원하는 생활이냐, 아니면 본심에 얼마나 상충되는 생활이냐 이거예요. 본심에 상충하지요? 본심이 하나님의 뜻이 아녜요?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가 얼마나 불충스럽고 부합되지 못한 자아인가를 여기서 새로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생활사로 미루어 봐서 알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좋은 것만을 기억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구원섭리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겠어요? 「아니요」 보기도 싫은 거예요, 보기도. 생각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어느 누가, 사랑하는 자식이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하고 있는데, 감옥에 들어가서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자식을 좋아할 부모가 있어요?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얼마나 비참해요? 아들보다도 더 비참함을 느끼고 심적 고통을 당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타락한 혈통을 통한 같은 입장에서 사는 땅 위의 부모도 그렇거든, 본성의 주인 되고 근원 되는 하나님의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크겠어요? 그걸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의 배후에서 섭리해 나온 하나님의 그 곡절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더우기 종교계를 중심삼고 보게 되면, 종교계는 모든 주권자와 나라로부터 반대를 받는 비참한 자리에 있습니다. 타락한 세계를 대해, 구원섭리하시는 하나님 자체도 비참한 자리에 있지만, 구원섭리를 이루려는 이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몰아내는 입장을 보게 될 때에, 그러한 세상을 대하는 하나님의 원한의 심정이 2중 3중(二重三重)으로 얼마나 사무쳤겠어요? 하나님도 낙심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 길을 포기할래야 포기할 수 없고, 없애 버릴래야 없애 버릴 수 없는 기막힌 사정을 누가 알겠어요? 여러분 입장하고 하나님 입장하고 볼 때 누가 더 불쌍해요? 「하나님요」 그걸 느껴야 돼요. 여러분이 마음으로 느껴야 돼요. 나는 비참한 하나님편이다 이거예요. 하나님편이라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뉴욕이라든가 미국 전역, 대도시를 한번 걸어 보라구요. 전부가 원수예요. 전부 원수입니다. 뭐 술을 먹고 디스코 장에서 춤을 추고 좋아 가지고 별의별 놀음을 하고…. 전부가 원수입니다. 자, 이러한 세계에서, 이런 세계를 내가 박차고 하늘세계로 돌아왔다면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죽어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해 봤느냐 이거예요.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무관심하지 않았느냐 이거예요. 모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 본심을 깨끗한 보자기로 쌀 수 있는 내 자신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거예요.

섭리의 뜻을 대하는 하나님을 부를 때는, 통곡에 사무치는 심정을 가지지 않고는 부를 수 없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한 것입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섭리의 뜻을 대하는 입장에 있어서 얼마나 무례했고 얼마나 체면 없고 뻔뻔스러웠느냐 이거예요. 자기만큼이라도, 세계에 있어서는 해방 못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고통으로부터 해방해 줘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구하고 뭐 어떻고…. 자기 집도 해결 못 해 가지고 인간을 구하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모순된 것이냐 이거예요.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나도 병을 앓고 있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나보다도 더 비참한 사람이 있으니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힘이 부족하니 '하늘이여, 내가 부족하니 힘을 주소서'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눈물 어린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해야 됩니다. 나를 이 고통 가운데서 구하고 내 어머니 아버지를 구하고 내 형제를 구하고 내 이웃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해방해 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저를 대해서는 구원섭리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지 마시옵소서. 창조적 이상을 가진 섭리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옵소서' 이래야 됩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라구요. 그런 하나님의 심정세계가 그렇게 곡절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세상이 핍박하고 감옥으로 몰아넣어도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한 해가 가고, 나이가 더 들어가거든, 새로운 한 해가 되었으면, 나는 지금 새로이 시작한다는 이런 마음을 언제나 가져야 됩니다.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통일교회 선생님을 따르는 여러분들은?

오늘 아침에도 내가 목이 쉬었다고요. 목이 꽉 잠기고 말이예요…. 어머님은 '아이고, 박보희가 와서는 안 돼. 누구 있을 텐데, 대신시키지. 오늘은 안 가도 될 텐데 왜 가느냐?'고 그랬어요. 그럴 때마다 쉬지 못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내가 안다구요. 심각한 얘기예요.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그 짐을 누가 풀어 줄 것이냐? 그건 여러분 혼자 못 푸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진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어요. 내가 이런 걸 알았다구요. 알고 느낄 때는 벗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