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집: 보여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 1962년 01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79 Search Speeches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금년에는 여러분들이 사탄의 참소를 피하여 하나님의 염려의 대상이 되지 말고 전후 좌우 상하 안팎으로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해 오시면서 자랑하고 싶어하시던 소원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늘과 땅, 온 피조만물 앞에 인정받고 더 나아가 이 땅과 사탄세계에까지 보이고 자랑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한 해에는 그것을 실천하고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창조이상세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온 피조세계를 대하여 당신의 심정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온 피조세계 앞에 보여 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존재를 찾고 계십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지금까지 역사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만물은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그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만물의 주인공인 인간이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이 만물과 인연을 맺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종의 자리로부터 시작하여 양자의 자리를 거쳐 자녀의 자리, 그리고 부모의 자리까지 끌어 올리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한스러운 타락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만물과 인간과 하나님이 일체의 인연을 맺어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의 기쁨이요, 인간의 기쁨이 만물의 기쁨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딸을 만물세계와 천사세계에까지 자랑하고 보여주고 위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느누구나 창조 당시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정적인 성품이 있기에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를 통하여 기쁨이나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서로 자랑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고, 인간은 자기들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주고 받는 기쁨입니다.

본연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데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끌어올리는 역사를 하십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협력하면 복귀섭리는 쉬울 터인데 지금까지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정을 걸어 놓고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으려 하는 사람을 찾기에 무한히 애써 오셨으나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반기를 든 사람은 있었으나 하나님을 환영하고 옹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가정, 민족, 국가, 세계에까지 뜻을 넓혀 오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적 외적으로 받으신 고충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국가나 민족도 평면적으로는 고생을 했노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고생했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인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상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왔다 간 모든 인간을 다 총합해 봐도 뜻을 위해 수고하고 협조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끌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책임지고 친히 수고하시며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영광으로 나타나실 존재입니다. 인간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의 기쁨이 되는 것이 창조의 이념인데 그 이념은 간 곳 없고 하나님께서는 처참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인간 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영광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떤 처참한 개인이나 민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영광의 모습이었으나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그 반대의 모습으로 계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녀인 인간에게 맡길 수 있고, 인간들은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입장이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참한 모습으로 자녀들 앞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고통과 사정을 통고하고 싶지 않고 무한히 애쓰는 슬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하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