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집: 아버지와 나 1959년 07월 1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48 Search Speeches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몸 마음의 주인임은 물론이요, 우리의 이념이나 우리의 감정세계의 주체격, 주인격에 설 수 있는 분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심정의 주인이요 주체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이나 인정에 의해서 관념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입니다.

비단 주인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어떤 격위(格位)에 계시는가 하면, 인간의 아버지로 계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놓고 주인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계십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내 아들 딸이라 하는 인연을 해명하고, 그러한 관계에서 행복을 노래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생활의 중심이요, 이념의 중심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아들딸의 모습으로 서야 할 인간이 타락하여 불쌍한 신세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을 아들딸이라 부르고자 하시는 그 아버지는 어떠한 처지이며, 아들로 서야 할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느냐.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환경과 처지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불러도 `오냐 아들아' 할 수 없고,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도 `예 아버지' 하고 대답할 수 없는 곡절의 권내에 떨어져 있는 이것이 타락입니다. 이 한스러운 명사를 걷어치우기 위해 내려온 것이 역사노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한스러운 명사를 밟아치우고 이것을 없애기 위하여 싸워 나오는 것이 그분의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쉽지만 실체적인 아버지로서 체휼하기는 어려우며, 인식적으로는 그 아버지를 감촉할 수 있으되 실체적으로 나를 대하고 계신 아버지를 모시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어인 연고이뇨. 타락한 연고입니다. 타락하였기에 이러한 입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허덕이고 있는 우리요, 이러한 자리에서 그래도 죽지 않고 살겠다고 싸우고 있는 나인 것을 시인하게 될 때 나와 그 아버지와의 간격이 어찌나 먼지 모르겠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리를 메꾸어 줄 수 있는 어떠한 지도자가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리를 메꾸어 평탄한 길을 닦아 줄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 지도자는 내 몸의 지도자만이 아니요, 내 마음의 지도자만이 아니요, 내심정의 지도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시기에 따라 변하는 지도자가 아니요 혁명적인 내용만을 내포한 지도자가 아닌 영원 절대적인 지도자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지도자를 생각도 해 보지 못하였다 할진대, 오늘 이시간, 자기를 반성하고 관념에만 사로잡힌 자아를 비판하여야 됩니다. 자기가 머물러 있는 위치를 알아서 다시 자아의 가치를 평해야 되겠고, 천지의 대운세 앞에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섰는가 비판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고마운 일이 있다 할진대 잃어버린 아버지를 소개해 주는 것 이상 고마운 일이 없을 것이요, 하늘에게 기쁜 일이 있다 할진대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것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다시 맺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왔다면 이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수고를 풀어드릴 수 있는 한 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