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집: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 1959년 08월 3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55 Search Speeches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러니 예수님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오셨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세계를 뒤로 하고 알아주는 분을 찾아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믿음을 상속받고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상속받아 그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적인 믿음의 주체, 실체적인 소망의 주체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대적인 믿음의 주체가 아니고 절대적인 믿음의 주체로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은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믿어야 돼요.

성경은 예수를 믿고, 예수를 소망하고, 예수를 사랑하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실체를 쓴 인간 앞에는 실체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예수를 실체의 모습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수고의 공덕 앞에 머리 숙이고 천만 번 울어 마땅합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터전을 세우고, 소망의 환경을 개척하고, 사랑의 울타리를 세우려 했던 예수의 이념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4천년 역사는 믿음의 실체를 세우기 위한 역사요, 예수와 성신 이후의 2천년 역사는 소망의 실체를 세우기 위한 역사입니다. 주의나 사상기준도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소망하는 세계관과 또 그 반대의 세계관이 오늘날 민주와 공산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소망이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 때를 끝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끝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조상이냐. 믿음의 조상이기보다는 소망의 조상입니다. 소망 중에서도 실체로서 소망할 수 있는 조상입니다. 인간에 조상이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할 것입니까? 우리는 몸 가운데 마음이 귀한 줄알았습니다. 마음 가운데 심정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마음의 실체대상과 심정의 실체대상이 되는 분 이상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를 대하여 `너희는 신부요 나는 신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그러니 세계는 아무리 나갔댔자 소망하는 그 이상의 한계를 못 넘어갑니다.

그러면 소망은 어떠한 소망인가?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말씀적인 소망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을 지나 실체를 고대해야 할 때입니다. 천만가지의 믿음의 명사보다도, 믿음의 역사가 훌륭한 것보다도 한 사람 실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한 실체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씀적인 소망의 세계관은 막혀 버립니다. 실체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그 세계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두고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