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집: 기도와 생명 1970년 06월 0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14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고통의 3일노정

그 누가 타락하라고 해도 타락할 수 없는 길, 아니 갈래야 아니갈 수 없는 길, 당연히 흠모할 수 밖에 없는 길, 그 길만이 내 생명의 원천이요, 그 길만이 내 생명의 주체입니다. 이러한 것을 스스로 갖고 싶고 인연맺고 싶어하고 그런 생활을 그리워하는 사람만이 오늘날 사망권을 넘어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순간은 평상시와 같은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을 것이며, 온 몸에는 골수에서 솟아나는 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힘을 주더라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상의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의 짧은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말은 뼛골에서 우러나온 최후의 음성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하는 그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정성을 다 들이면서 아버지와의 인연을 찾아온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고 간곡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배후에 숨겨진 실낱 같은 소망의 한 빛이 바로 마음에서 솟아난 울부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는 그런 경지를 필히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거기에서 잡아지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절대로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번 잡은 것은 천년 만년 놓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잡은 것은 무엇이 될 것이냐? 그것은 아버지의 어깨가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아버지의 팔굽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아버지와 인연된 어떠한 옷자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잡고 잡아당길 때는 내가 끌려가지 않으면 그가 끌려올 것이니 하나님과 더불어 뒤넘이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개인들 앞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이 입산수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 놀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들이기 위해서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성은 얼마만큼 들이느냐? 그 정성의 한계점이 어디냐? 그것은 먼저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무아경지는 정상적인 자리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밑의 골짜기에 떨어진 입장에 서 가지고 어려운 세상의 짐을 졌다면 누구보다도 큰 짐을 졌고 불쌍하다면 최고로 불쌍한 자리에서, 최고의 절박감을 느끼는 그러한 자리에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탐지해 나가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뒤 3일 동안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은 무슨 뜻이냐? 하늘땅이 사망권에 남아 있고 지옥도 사망권의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늘땅을 주관하기 위해서는 이 사망권을 밑으로도 넘고 위로도 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과 같은 맨 밑바닥의 경지에 가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넘어 가지고 생명의 인연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소망의 길을 가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지옥과 같은 그 환경을 거침으로 말미암아 소망의 천국을 향하여 재출발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으며, 지상에서도 버림받고 몰리고 죽음의 길을 갔지만 소망의 길을 남겨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3일노정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3일 동안 예수님은 지옥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지옥을 모르는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판결을 내려 가지고 사망세계에서 생명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터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망의 지옥 세계인 이 지상에 승리의 기반을 닦아 놓았으며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원을 이루어 놓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