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집: 축복가정이 머물러야 할 본연의 전통적 기준 1997년 04월 16일, 한국 제주국제연수원 Page #135 Search Speeches

하나님을 절대신앙·절대사'·절대복종해야

오늘날 사탄세계에서 거리의 여인이 남자예요, 여자예요? 제비 패도 생겼지만 말이에요. 제비 패들하고 거리의 여인이 상대 없이 천사장 자리에서 서로 서로가 만나 가지고 좋아하고 그런 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까지 침투했어요. 나라의 왕궁까지 다 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근본적으로 이것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통일교회 축복 받은 가정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때 있어서 마음이 몸한테 사랑을 중심삼고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때에 마음의 힘과 사랑된 그 힘의 관계가 양심보다 높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도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부모가 반대하면 목을 매고 몸뚱이를 로프로 감고 바다에 추락해 죽고 다 그러잖아요. 타락한 생명, 본연의 양심의 생명까지 묻어 버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극복하느냐? 극복하는 방법이 둘밖에 없어요. 몸뚱이를 약화시키는 작전이 있고, 그 다음에 반대로 마음의 세계에 강한 힘을 보급하는 작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기도하고 정성들이고 몸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40일 금식으로 때려잡아서 희생시키려고 하면 하늘의 본연적 사탄세계의 장성 완성급 경계선을 넘어서 무한히 힘이 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불 받는 일이 벌어져요. 더렵혀진 몸이 타 들어가 가지고, 하늘의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려 들어가 가지고 무한한 힘의 세계에 접촉하는 것입니다. 이걸 연결시켜야 몸뚱이보다도 강한 양심의 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몸 세계를 끌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끌고 갈 수 있는 힘의 작용을 얼마만큼 훈련해야 하느냐? 3년 내지 5년의 습관성을 붙이지 않고는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구요. 3년 내지 5년을 불 받은,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3년 동안은 붕 떠 돌아가요. 그거 느끼지요? 교회 가고 싶지 딴 데 가고 싶지 않아요. 뭘 하고 싶지 않아요. 낮잠을 자더라도 교회 가서 자고, 보리밥 먹더라도 교회에서 먹는 거예요. 이밥에 소고기 반찬으로 맛있게 먹는다 하더라도 그거 싫어요. 보리밥이라도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 가지고 자기 좋은 방에서 혼자 살던 것이 여러 사람이 발을 한 이불에다 넣어서 꼬여도 그게 좋다구요. 그게 3년 이상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때 해야 할 것이 마음의 기준을, 일상생활에 몸이 움직이니 몸이 마음을 끌고 다니고 것을 반대로 마음이 몸뚱이를 끌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놓아야 돼요. 그 경지에 가면 벌써 나쁜 일을 알아요. 왼쪽으로 갈려면 벌써 이 몸뚱이가 알아요. 기분이 나빠요. 보는 시력이 약해지고 생각이 모호해져요. '아이쿠, 반대로 가야지!' 하는 거예요. 자동적으로 치리할 수 있는 경지를, 정성들이는 도수를 계속시켜 가지고 습관화될 수 있는 승리의 기반을 마련해야만 된다 하는 거 알아야 된다구요.

그러려면 그때는 전부 다 버려야 돼요. 부부의 사랑이라든가 부모를 위해 효도한다든가 전부 다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돼요. 여기서부터 뭘 하느냐 하면, 절대 하나님을 신앙해야 돼요. 절대신앙, 하나님을 절대사랑하고 절대복종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상속해 줄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니까 하나님이 절대신앙 위에서, 절대사랑 위에서, 절대복종하는 자리에 천지를 창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은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 위에 세워 놓은 것이 피조만물의 창조이상입니다. 거기에 중심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아담 해와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아담 해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 위에서 지은 그 기준이 절대믿음과 절대사랑과 절대복종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잖아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그 중에 제일이 뭐라구요?「사랑입니다.」딱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신앙 위에 만물을 지었고, 절대사랑 위에 지었고, 절대복종이라는 것은 자기 의식이 없어요. 상대존재 의식만을 위한 것입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가 아니예요. 미래에 바랄 수 있는 상대적인 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