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집: 뜻과 나 1970년 12월 2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19 Search Speeches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하" 것이 신앙자의 "른 생활

복귀섭리역사를 보면 아담 가정에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 가정과 예수를 중심삼은 요셉 가정까지 4천년의 역사가 내려오고 있지만, 그들이 실수하게 된 동기는 어느 한 해를 중심삼은 것이 아닙니다.

아담 가정에 있어서 아담 해와가 타락한 것도 1년이나 10년, 혹은 몇십 년을 계획하여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실수는 한 순간에 초래되었으며, 한 순간의 실수가 억천만세 이어온 그 나라를 팔아먹는 터전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순간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순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오랜 역사시대에 도의 길을 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수난의 보응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뜻을 따라가지 않는 수많은 민족은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이 엄청난 탕감의 제물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지내고 있는 하루의 생활권내의 한 시간 한 시간도 무섭지만 한 시간권내의 똑딱 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무서운 순간인가 하는 것을 느끼며 싸워 나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도 한 순간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출발은 내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출발은 내가 뜻을 알고 난 순간부터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초의 순간이라도 시간적 관계를 두고 비약이 있든가 구렁텅이가 생겨나면 영원은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애노정을 중심삼고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금년에 못 가면 명년에 가고, 명년에 못 가면 내명년에 가고, 10대에 못가면 20대에 가고, 20대에 못 가면 30대에 가고, 30대에 못 가면 40대에 가고, 40대에 못 가면 50대에…. 일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일생을 거쳐서 뜻과 더불어 하나될 수 있는 하루의 생활을 가져 보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살았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살고 있는 그 나라가 좋다 하더라도 하루의 승리의 기준을 갖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으며, 일년의 승리의 기준을 갖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의 생활에 있어서 영원을 꿈꾸고 나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앞서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현실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어떻게 악을 청산짓고 선의 기수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담의 순간적인 실수가 억척만세의 한을 맺어 놓았던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 아벨이 부모의 한을 풀고 형제의 담벽을 무너뜨려 가지고 하나의 가정의 기원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복귀섭리의 대표로 세워졌던 아벨이 죽었던 것도 순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20년 걸려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수고의 노정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제 내 소원성취의 날이 왔으니 `배에 오르라'고 하신 명령도 한 순간에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명령에 동조한 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심판권내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창성하여 만국을 덮고 남으리라'고 축복하셨는데, 그 축복의 명령도 똑딱 하는 한 순간에 내려졌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제사를 지내는 시간도 몇십 년 동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단 하루라는 시간권내였습니다. 제물을 쪼개어 제사 드리는 시간은 한 시간 미만권내였지만, 여기서 역사적인 모든 생사화복의 기원이 짜여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잘못되면 그 기원이 파탄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날 신앙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끝날에 찾아오는 심판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생활권내에서 찾아오는 시간을 어떻게 뜻과 일치시키느냐, 어떻게 뜻과 더불어 교차로를 형성하고 나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찾아오는 시간 시간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뜻을 중심삼고 그 시간을 승리로 이끄는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중심삼고 고심하며 싸우는 것이 무엇보다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노정에 있어서 모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을 보자 화가 나서 석판을 깨뜨렸던 것은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억천만세 이스라엘의 형성을 근본적으로 파탄시킬 수 있는 화근이 되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순간의 일이 역사의 흥망을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 시대에 있어서도 마리아와 요셉 가정에서 자라던 예수가 30세가 되던 해에 공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결의를 하고 집을 떠났던 것도 순간이었습니다. 공적인 3년노정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비운의 자리에선 예수는 집을 뒤로 하고 믿을 수도 없고 바랄 수도 없는 황막한 광야와 같은 길을 향해 나섰습니다. 예수가 그러한 곳을 향하여 나서기로 다짐하던 시간은 순간이었고, 집에서 나가는 발걸음은 한 걸음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이 비운의 6천년 역사로 연장시켰고 기독교를 2천년의 수난의 길로 가게 할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가 그 집을 나가기 전에 마리아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이 맺어져 있고, 요셉이 자기 일가 친척을 모아 공동회의를 하여 예수님이 자기 사연을 털어 놓고 토로라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는 무지몽매한 어부들인 베드로·요한·야고보와 같은, 그 시대에 있어서 맨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 애달픈 3년 공생애노정을 가는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먼 세계에서 이루어질 뜻이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서 이루어질 뜻이요, 나를 중심삼은 가정에서 뜻이 이루어져야만 먼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복귀의 순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요셉 가정이 예수를 중심삼고 울타리가 되었던들 예수에게 십자가의 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못함으로 인해 지금까지 2천년 역사가 연장되어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