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집: 자녀의 날을 맞는 우리의 각오 1970년 10월 3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96 Search Speeches

자녀의 날이 찾아지기까지의 수난의 -사

지금은 외적으로 세계적인 무대까지 갖추어졌지만, 이 자녀의 날이 찾아지기까지 내적인 심정을 가려 나오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수난의 길을 거쳐왔는 가를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외적으로는 섭리를 중심삼아 가지고 선민권을 확대시켜 나왔습니다. 유대교적 선민권, 기독교적 선민권을 확대시켜 세계를 포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내적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언제나 심정적으로 일치된 하나의 종족을 편성하기 위해 준비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습니다.

아담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형제인 가인과 아벨이 싸웠습니다. 가인은 사탄편에, 아벨은 하늘편에 분립하여 세워 가지고 아벨을 중심하여 가인을 굴복시키는 싸움을 전개시킨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싸움은 가인과 아벨이 장성한 입장에서 싸운 싸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인 복귀를 위해서 생명의 기원까지 거꾸로 올라가 재생시켜 나온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이 실패한 것을 에서와 야곱의 쌍태를 중심삼고 분별의 역사를 한 것입니다.

야곱은 천신만고의 수난과정을 거친 후에서를 굴복시켜 승리의 터전을 갖추었습니다. 여기에서 외적인 이스라엘권은 마련됐지만 내적인 이스라엘권은 출발할 수 없었습니다. 이 내적 내용을 갖추기 위해서 야곱의 아들 유다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3대 형태의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다말과 유다의 핏줄을 통한 베레스와 세라의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인 아벨을 복귀할 수 있는 승리적 기준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복중에서부터 승리의 자리를 차지하여 형으로 태어날 수 없었던 그 한스러운 역사를 탕감시킨 것입니다.

또, 다말처럼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망각하고, 자기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늘 아버지의 뜻만을 일념으로 따르고, 세계적인 섭리 역사의 뜻을 위해 자기의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의 역사적인 교단이 형성되게 한 여성이 마리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메시아를 잉태할 것을 예언했을 때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데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오나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있어서는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요, 자기의 위신과 처지가 모두 몰락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축복이 땅 위에 새로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즉,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망각하고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하늘의 심정을 흠모하는 자리에서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혈통적으로 승리의 분별점이 갖추어졌고 그 기반 위에 예수님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랑의 기원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분별된 아들로 태어나는 그 시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유발할 수 있고 위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열 달 동안 복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은 태어나는 그날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복중에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고, 태어나서는 유아 시대부터 청년, 장년, 노년시대까지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대표적인 아들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복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시켰고, 그가 태어나는 그 시간 천군천사가 환영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동방에 있던 세 박사가 황금, 유황, 몰약을 가지고 와서 세계 인류를 대표해서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실체를 갖춘 영적 세계의 천사장을 대신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남모르는 가운데서 복귀섭리의 뜻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 위에 메시아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이는 4천년 역사의 희생의 결과였습니다. 역사적인 승리를 마련할 수 있는 방패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보호하고 받들어야 할 것이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는 예수님을 환영하기는 커녕 반기를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두 번째로 타락의 한을 안겨 드리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그대로 인간시조로 타락했지만, 복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복귀의 희망이었고, 새로운 소생의 소망이었던 그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유대교를 중심삼고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벌인 소동(마 2:1-)이 하나님을 얼마나 슬프게 자극시켰는 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님을 지키기 위하여 애급 땅까지 인도할 때의 그 숨은 곡절과 하나님의 서글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하여 애급에서 3년을 지내고 갈릴리 해변가로 돌아와 자라는 예수의 생활은 남이 모르는 외로운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있으되 어머니로서 사랑할 수 없는 어머니요, 아버지가 있으되 의붓 아버지요, 형제가 있으되 의붓 형제요, 친족이 있으되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자라던 예수님의 유아 시대가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예수를 중심삼아 가지고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하여 형제를 사랑하고 싶었고, 친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사랑하고 싶었는 데 완전히 두절되어 말았으니, 예수님 한 분만을 중심으로 소원했던 하나님의 서글픔이 얼마나 컸었는 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회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소망의 날을 기대하시던 30년 기간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외로운 기간이었던가. 예수님이 모든 어려운 환경을 개척하여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의 자리는 나가지 않기를 하나님은 내적으로 간절히 바라셨고 또 그러한 환경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저버리고 반역한 죄를 짊어진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이기 때문에, 유대교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탕감의 노정을 가지 않을 수 없었고, 역사적인 화를 받는 민족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천년 동안 나라 없이 유리고객하는 민족으로 세계의 수많은 민족 앞에, 혹은 그들의 총칼 앞에, 수많은 원수들의 발굽 아래 희생되어 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역력해 아는 바입니다.

겨우 1948년도에 유엔의 공인을 받아 하나의 자주적인 국가로서 독립은 되었지만 주위에 있는 원수들을 다시 한 번 정복하지 않고는 민족이 승리의 터전을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 민족이 책임을 못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을 이루고 승리한 민족의 자세를 갖추기 전에는 재차 싸움의 노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기에 현재 아랍권에 포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이스라엘의 입장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