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집: 정성과 극복 1971년 03월 1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28 Search Speeches

정성으로만 극복이 가능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자기 나라를 중심삼고 세계를 제패하여 영광을 누리려 했다는 거예요. 자기들의 행락만을 꿈꾸었다는 거예요. 비운의 역사에 있어서 슬픔과 더불어 사라질 수많은 인류를 생각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은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노정에 있어서도 극복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극복은 무엇을 가지고 하느냐? 그것은 수단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슨 재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오직 정성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모셔 봤느냐, 얼마만큼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해 봤느냐, 얼마만큼 정성들이는 감동을 통해서 느끼려고 했느냐, 또 그러한 체휼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러한 체휼을 가졌으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체휼을 하게 하느냐, 그 사람이 나를 대해 하나의 은사의 주체로서 믿을 수 있고, 그 사람이 나를 대하여 생명의 기원으로 느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전도를 하러 나간다 할 때 그냥 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가지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는 데 있어서 일주일이나 한 달, 혹은 일 년 이 년 삼 년은 걸릴 것이다 하면 그 기간 동안 정성들여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먹으나, 자나 깨나, 오나 가나, 혹은 쉬나 어떠한 행동을 하나, 일체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 앞에 완전히 전부 주어 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면 완전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에 가서 인격이 되는 것이요, 영광의 터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부에 있는 교인들 중에 오래 되었다는 사람 '내가 먼저 교회에 들어왔는데'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생님도 그러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식은 평등하게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사람은 잠 잘 때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지 않습니다. 제일 나쁜 자리에 가서 자는 것입니다. 정성은 세상에서의 좋은 것과 비례가 아니라 반비례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정성이 안 들여지는 것이요, 나쁘다고 하는 자리일수록 정성이 잘 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성은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이 민족을 위해 정성들일 수 있는 단체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민족의 운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민족을 대표한 비운의 자리에서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체가 되면 민족이 망하더라도 그 단체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천륜입니다. 이게 틀리면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 수난의 종교라는 거예요. 그 수난의 배후에는 죽음의 교차로가 연결된 정성의 터전만이 남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분과 제단은 피어린 정성의 터전과 더불어 상속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라고 할 때 이 말은 무서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제단이 연결되어 공의의 심판권을 가지고 심판할 수 있는 거룩한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