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집: 가야 할 탕감길 1969년 12월 2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85 Search Speeches

탕감길을 가야할 현시점

모든 종교는 개인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를 숭배하고 본받으려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한분을 본받으려는 종교입니다. 그 이상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는 개인으로서 세계적인 하나의 중심 교주로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중심으로 끝나면 그는 망하는 것입니다. 독신 생활을 부르짖고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그건 망하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새로운 가정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이념, 새로운 종족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이념과 세계와 천주의 복귀라는 이 엄청난 문제를 중심삼은 종교적인 이념이 있는 것입니다. 복귀시대를 향하여 출발한 출가병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복귀의 도상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개인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가정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종족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민족과 국가를 살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4천년 동안 수고해 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선민국을 만든 것입니다. 개인을 해결함과 동시에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이 가는 노정 앞에 있어서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수고의 내용을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수고의 결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탕감의 대가를 치러서 이것을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될 때 그것이 제일탕감입니다. 개체탕감을 위주로 한 예수님의 승리적 기반 위에 가정탕감, 종족탕감, 민족탕감, 국가탕감이 일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적 기반을 갖추었던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개인 탕감의 결과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육을 중심삼은 승리의 탕감권을 갖지 못하고 영적인 탕감길만을 닦았다는 사실은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한도 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보냈던 하나님의 한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탕감복귀라는 운명의 길을 우리가 상속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의 이 현시점이 얼마나 중요한 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나라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점은 통일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통일교회와 나라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귀섭리의 원칙, 이런 창조의 원칙을 두고 볼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 자체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책임지느냐? 하나님이 책임지느냐? 95퍼센트의 책임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요, 5퍼센트의 책임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해져서 100퍼센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의 권한에 가담되기 위한 특권적인 권한을 부여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95퍼센트의 책임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요 5퍼센트의 책임은 인간이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러한 기준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역사는 시작했다가 참된 세계의 맛도 보지 못하고 시작과 더불어 저물어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참된 세계의 맛을 모르는 세계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역사적인 핵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는 나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 정세는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느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해서 생겨났느냐? 나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가기 전에는 대한민국은 못 갑니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이 생겨나서 걸어온 그 길을 대한민국 자체를 위해서 걸어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느끼고 각자가 나라를 책임지려는 국민이 될 때 그 국민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국민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갈망하는 국민입니다.

그러나 천주주의라는 엄청난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이 이 사조를 넘어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승리는 아직 과정적인 승리이기 때문에 단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단결할 것을 제창할 수 있고 긴장감을 가지고 결의하게 할 수 있는 주의가 있다면 그 주의는 틀림없이 세계로 웅장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천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늘땅, 온 피조 만물에 대하여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와 자주성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대표적인 왕자가 되고 왕녀와 같이 내일의 희망의 꽃을 피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꽃의 가시가 되고 여기에 반대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 놓고, 내가 승리를 찬양하고 전체가 찬양할 수 있는 날, 전체와 일심동체가 되어 그 환경에서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신을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치렀습니까? 치렀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것입니까? 죽음의 칼이 천대, 만대 가중하여 가해지더라도 참된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그러한 가치 앞에는 어떻게 해야 되지요? 죽음의 교차로가 정면으로 내 앞에 닥쳐올 때는 피하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세계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런 것을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자아의 주관성을 지닌, 끈기있는 자기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참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개인의 참된 기준은 하나인 것입니다. (테이프가 끊김으로 중략)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자기 뜻에 비하여 아버지의 뜻이 큰 것을 느끼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면서 아버지 뜻대로 대가를 치렀을 때 거기서 내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지시게 된 십자가를 기쁨으로 소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기뻐 따라줘야만 새로운 역사가 밟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엄숙한 자리, 그럴 수 있는 참된 인간의 모습, 그럴 수 있는 참의 대가를 지불한 절대적인 곳으로 돌아서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예수님은 절대권내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절대권내에는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그 뜻과 그가 남긴 사상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상대적인 이 환경을 수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의 문화를 창건하였습니다. 복귀섭리의 외적인 환경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의 가치는 누가 결정했느냐? 예수가 결정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누구에게 맡기고 싶어요? 여러분의 생명을 누구한테 맡기고 대신 살아달라고 하고 싶으냐 말입니다.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10년이면 10년동안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나왔다 할진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해 놓고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탕감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못 가는 것입니다. 길이 생기지 않습니다.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야 할 탕감길, 7년노정에서의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통일의 길은 그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길이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운 기독교의 새로운 복음은 그런 대가를 치른 후에 생겨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