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집: 최후의 결정 1987년 09월 13일, 한국 본부교회 Page #122 Search Speeches

무시받고 멸시받" 환경을 걸어온 통일교회

어머니를 모시 기까지, 복잡한 이런 통일교회…. 선생님이 1960년도에 성혼을 하기까지, 해방 후 14년이 지나기 전에는 가정을 못 가졌어요. 나라의 기반을 조성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안 돼요. 14년을 넘어 어머니를 맞아 제2 축복시대를 향해 들어가게 될 때까지, 갖은 수욕을 당한 것입니다. 개인의 배신, 여자의 배신, 남자의 배신, 역사시대에 한 남자로 태어나 가지고 참지 못할 와중의 길, 곡절의 길을 상하 전후 좌우로 거쳐가야 했던 것입니다. 나라가 무시하고 환경이 멸시하고 모든 단체가 멸시했습니다.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있을 때, 구치국장이 기성교회 장로라나? 그 사람이 와 가지고 핀잔을 주던 그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소위 문제를 일으킨다던 문 아무개로구만, 꼴 좋구만. 말로가 다 뻔한데 보따리 싸 들고 회개하지 않고 뭐야? 또 계속할 거야?' 그러고 있더라구요. '이놈의 자식, 10년, 20년 두고 봐라. 네 이놈의 자식, 3대를 거느리고 배밀이를 하면서 나한테 와서 무릎을 꿇고 통회할 날이 올 것이다' 했습니다. 내가 그 분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또 통일교회 이놈의 간나들, 이놈의 자식들, 자기들이 다니다가 떨어져 놓고는 변명을 해야 되겠거든요. 자기가 옳고 문선생이 나쁘다고 있는 말 없는 말로 다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 간나가 죽었다는 소리를 벌써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면서 간다는 곳이 형무소구만. 꼴 좋구만.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고 그게 뭐야?' 하고 핀잔하던 것, 내 안 잊었어요. 내 가슴에서 아직 안 잊혔습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그 수욕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말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내가 거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말하지, 말하지 않았어요.

어려움이 있으면 다짐하는 것입니다. 너 아무 때를 잊었어, 아 자식아? 그 분함과 억울함과 분통함을 잊어버렸어? 가야 할 길이 천리길 만리길이 남았는데 숙박길 행각의 자리에서 놀고 춤추고 잠잘 수 없어! 여편네 끼고, 무슨 계집을 끼고 놀 수 없어! 이렇게 자기 가는 생활에서 채찍질하며 다짐해 나온 것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길을 닦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자가 갈 길이 얼마나 복잡해요? 역사시대에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혼자 가기 어려운 그런 길을 개척해 준 것입니다. 그때 보라구요. 60년대에 어머니를 모셔 올 때 말이예요. 그때 뭐 이화대학 선생이 없었나, 박사 된 사람이 없었나, 석사 된 사람이 없었나 말이예요. 명원회는 전부 다 이화여대 출신, 말승냥이 같은 사람들이었다구요. 그런 사람들이 혼자 사는 선생님이니까 '나 한번 상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전부 다 꼬리를 젓고 하는 그런 판국이었습니다.

여자라면 또 그럴 만도 하지요. 나 못난 남자가 아니라구요. 한번 프로포즈할 만하지요. 안 그래요? 뭐 별의별 일이 많았습니다. 처녀들이야 물론이지만, 80된 노인도 '선생님은 내 상대이기 때문에 누구도 안돼' 그랬어요. 그럴 때예요. 역사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해와라는 특권적 혜택을 일시에 주기 때문에 봄바람이 다 불어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내 남편이다' 해 가지고 요사스러운 일이 많았다구요. 내가 여자들의 그 진구지통을 벗어나려고 얼마나 수난길을 거쳤는지 몰라요. 내가 원리를 다 알기 때문에 그랬지, 그렇지 않았으면 거기에 빠져 가지고 벌써 다 흘러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게 다 어머니의 갈 길을 위해서입니다

시간이 자꾸 가는구만. 저 시계 떼 버리라구요. (웃음)

40이 된 남자 앞에 말승냥이 같은 것들이 수두룩하게 줄을 지어 가지고 철옹성같이 버티고 앉아서 '어디 누가 선생님의 상대가 되나 보자' 하던 판이었습니다. 눈이 새빨갛게 돼 가지고 그러는데 선생님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거기에서 제일 잘난 여자를 어머니라고 떡 갖다 모시면 좋겠는데 말이예요. 보지도 못한…. 20세가 넘으면 안 돼요. 18세가 넘으면 안 된다구요. 기가 차지요? 어쩌다가 문 아무개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지….

이 드센 통일교회의 복잡한 환경을 수습할 수 있는 여편네를 택하는데 자유로이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조건적 기준에서 그 나이 이하의 사람을 만나야 하다 보니, 쌍가닥 가랑 머리를 한 고등학교 학생이나 대학교 1학년생쯤의 상대를 찾는 처량한 사나이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그건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모르지요. 자기는 '내가 이쁘고 잘생겼으니까 선생님도 홀짝 반해서 나를 택했지'하고 간단하게 생각하지, 복잡한 내용은 몰라요. (웃음) 그것이 어느 때까지는….

그런데 서로가 '누가 된다, 누가 된다' 하면서 할머니, 어머니, 딸, 이렇게 3대가 합해 가지고 별의별 짓을 다해서 사바사바하려고도 그랬어요. 내가 사바사바하는 데에 녹아나나요? 안 걸립니다. 벌써 그걸 안다구요. 내가 욕심이나 많고 잡됐으면 벌써 다 깨져 나갔다구요. 어느 누가 문 아무개를 자기 손아귀에 휘어 못 잡아요. 그런데 난데없는 쌍가닥…. 미안합니다, 엄마. 이렇게 다독거리고 얘기해야 내가 들어가 가지고 기합 안 받는다구요. (웃음) 이 여자들 좋아하는 것 보라구. 저 쌍것들! 내가 아쉬워서 그런 줄 알아? 다 여러분이 본받으라고 그러는 것이야!

생각해 보라구. 그래 가지고 결혼을 떡 해 놓고는 3년 동안 곁방살이를 시켰습니다. 못 들어온다 이거예요. 홍순애 할머니도 절대 자기 딸이 있다고 정문출입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뒷문 출입하게 했습니다. 내 눈 앞에서 정문출입을 했다가는 큰일나는 거예요. 3년 동안 그렇게 했어요. 세상으로 보게 되면 사위 되는 사람이 장모를 대해서 그렇게 얘기한 역사가 있어요? 왜? 어머니의 친족이 많아서는 안 돼요. 여기 삼촌 짜박지 혼자 와 앉았구만. 친족이 많으면 안 됩니다. 형제가 많으면 곤란하다는 거예요. 맨발, 왕발로 막 드나들고 간섭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피난을 왔으니까 떼거리가 없지요. 떼거리가 있으면 곤란하다는 거예요. 다 뜻을 중심삼고 결혼한 것입니다.

그렇게 3년 동안을…. 그때는 집도 없었다구요. 그때 집이 있었어요? 김인철이! 김인철이 왔나? 「예」 저 나이 많은 김인철의 집 찬방 하나를 얻어서, 어머니가 김인철의 셋방에 붙어 살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박대를 못 한다구요. (웃음) 거기서 예진이를 낳고 그랬어요. 그때 거기서 바람을 쏘여 가지고 몸이 안 좋아요. 요즘도 어머니가 나한테 불평하는 것이 '그때에 바람을 맞아 가지고 그랬는데, 동정도 안 하고 애기를 열 넷씩이나 낳게 했으니, 뭐 어떻고 어떻고…' 그래요. 열 넷씩이나 내가 낳으라고 했나, 하늘이 낳으라고 했으니 낳았지, 20년 동안에 열 둘 이상을 안 낳으면 큰일나는 거예요. 큰일나요. 그렇지 않으면 첩을 얻던가 해서라도 수를 채워야 된다는 거예요. (웃음) 왜 웃어? 그런 사정을 누가 아느냐 말이예요.

역사를 가름하고 역사의 썩은 기둥들을 대신해 세울 수 있는 하늘의 조건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했겠어요? 선생님이 색시를 얻었으면, 색시만 해도 열두 사람은 됐을 거라구요. 혼자 20년 동안에 뽑아 내려니 그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힘든 걸 내가 잘 압니다. 배를 한 번 째고 난 다음에는 의사도 하는 말이 두 번 째라고 하는 남자는 야만인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말이예요. 두 번만 쨌나요, 네 번을 짼 거예요. 안 돼! 낳아야 돼! 그래서 하늘도 바쁘니까 닐리리 동동으로 한 거예요.

내가 우리집 사람 보고도 얘기했지만, 두고 보라구요. 더 나중에 낳은 아이일수록 귀한데 배를 째서라도 낳아야 되겠어요, 안 낳아야 되겠어요? 낳아 보라는 것입니다. 난 그걸 알아요. 그 애들을 안 낳았으면 어머니가 섭섭했을 거예요. 어쩌면, 어쩌면…. 다 천운을 갖고 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