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집: 기도와 생명 1970년 06월 0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26 Search Speeches

하나님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이 되라

내가 지금까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하나님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저를 고생시킵니까? 축복해 주신다고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생님하고 얼마나 약속을 많이 했겠어요? 얼마나 많이 했는 줄 알아요? 수십만 번 약속을 했습니다. `너는 요렇게 될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때에 내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증거 자료를 갖다가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면서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이 속았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속인 종자와 인연맺은 타락권내의 미스터 문이니 별 도리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선생님을 염려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믿지 못할 까봐 별의별 사람을 다 선생님 앞에 증거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나오면서 이제까지 고문을 당하고 별의별 서러운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가는 사람, 즉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흘려 보지 못했던 새로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내 생애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흘려 보지 못한 새로운 눈물을 흘리고 죽자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만한 심정을 가지고 죽었느냐? 선생님은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짐으로써 하나님께서 `너는 누구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죽은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는 천년 만년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죽더라도 그러한 심정과 내용을 갖고 그러한 자리에서 죽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매를 맞아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이보다 더 슬픈 눈물을 짓고 안타까와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은 역사시대의 그 누구에게보다도 나를 통하여 애석한 사연을 남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것을 필생의 소원으로 삼고 나왔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이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세계 만민 가운데 많다 하더라도 통일교회의 문선생만큼 되겠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나는 복귀노정을 다 알고 하나님에게 `당신이 가야 할길이 이 길이 아닙니까?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는 기도를 합니다. 시시하게 지나간 것에 대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같이하실수 있는 이 길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십년, 아니 백년, 혹은 천년 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을 이 시대에 어떻게 인연을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어떻게 그때를 위해서 피땀 흘리고, 그때를 위해서 어떻게 수고의 조건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선생님이 모색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나온 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자' 하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두고 보라는 겁니다.

자기의 욕심대로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참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욕심장이의 정성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정의라는 것은 폭군의 칼날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길이 어디에 있느냐? 어떤 길이냐? 어디를 향해 가는 길이냐? 하나님을 따라가야 되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런 길을 가게 하기 위해 수많은 작전을 해 나왔습니다. 마음은 하루만에 가고 싶지만 6천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에라도 갈 수 있는 길을 닦자는 것입니다. 6천년의 종적인 역사를 하루권내로, 한 시간권내로 좁혀 타락했다는 그 기준을 탕감시키려면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 통일교회를 따라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앞에 짐을 짊어진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고 저렇고 하며 별의별 비판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