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집: 체휼과 실천 1975년 02월 0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37 Search Speeches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서 부족한 면을 보강해야

우리 사람은 이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면에서는 뾰쪽하다는 거예요. 이것이 달라요.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해지면 이것은 시종여일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못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반드시 굴러 떨어진다 이거예요.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이렇게 작다면 이것이 영원히 못 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우리는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영적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평행을 만들어 가지고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라.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요, 진리 세계의 중앙에 서 가지고 중심적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만 강하면 외적인 면은 결여되어, (판서하시며 말씀하심) 이렇게 곧장 가야 할 텐데 이렇게 간다구요, 이렇게. 그럴 거 아녜요? 힘으로 본다면, 힘센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예요. 진리적인 면이 강하면, 이것이 둘이 합해서 가야 할 텐데 왼쪽으로 가 버린다 이거예요. 이런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선생님 같은 사람은 영적 체험이 있더라도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구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진리로 조정해야 됩니다. 이것은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하면서 중용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하늘의 섭리관에 방향을 일치시키는 놀음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영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고 지상세계의, 진리세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러려면 영적 세계가 어떻게 움직여 들어오고 진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그 사실을 생활화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리가 반드시 하나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체가 어디에서 행복감을 느끼느냐? 진리면에서 느끼는 행복은 방향적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거 왜 방향적이냐? 영과 육, 신령과 진리를 두고 보면 어떤 것이 주체냐? 신령이 주체입니다. 진리는 상대적 이예요. 상대적이라는 것은 방향적입니다. 이건 변한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신령은 변하지 않아요. 중심적이기 때문에, 사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이 귀하냐? 진리를 통해서 느끼는 느낌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변합니다. 오래 못 간다 그 말이라구요. 그렇지만 신령을 통해서 느낀 그 느낌은 중심적이기 때문에 오래간다는 거예요. 중심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걸 알아야 돼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진리는 상대적 입장이고 신령적인 면은 주체적 입장입니다. 주체란 중심자리를 말하기 때문에 중심이란 것은 둘이 있을 수 없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중심이라는 것은 사방을 대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주체적 중심적 입장의 신령면을 통한 기쁨이라는 것은 영원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느낀 그 기쁨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인 당연한 결론입니다. 이렇게 돼 있는 거예요.

이러한 두 면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지식을 중심삼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실천문제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걸 반드시 보강해야 됩니다. 보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도만 하고 신령면에만 치중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진리에 대해서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양면이 보강돼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걸 내 자신이 혼자 조정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를 잘 선택하라는 거예요. 내가 신령적이거든 진리적인 사람과 하나돼라 이거예요. 그래 가지고 둘이서 '야! 내 맘은 이런데 네 마음은 어떠니?' 이렇게 속삭이고 말이예요. 형(型)이 달라요. 하나는 내형적이요, 하나는 외형적인 이 두 사람이 '내가 그래?', '내가 그래?' 이렇게 서로 의논하고 서로 협조해서 완전히 하나될 수 있으면 신앙세계에 있어서 서로서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가 필요한 거예요.

통일교회 믿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경험 많이 했지요. 뭐 어떻고 어떻고 그런 말을 듣고 심령에 타격을 받아 가지고는 새까매지는 거예요. 그건 자기 혼자 암만 기도로 해결하려 해도 지극히 어려운 거예요. 그렇지만 자기와 상대적인, 진리적인 외적인 사람을 중심삼고 친구가 되어 있으면 '야, 이 녀석아 이렇게 해' 하고, 또 진리적인 면의 사람은 영적인 면의 친구가 그러면 '야! 내가 기도해 보니까 이래'이렇게 되면 쉽게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앙자에게는 반드시 친구가 필요하다 하는 걸 알아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