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집: 우리들 참으로 같이 살고 싶구료 1986년 10월 11일, 한국 서울 롯데호텔 Page #255 Search Speeches

하나님과 인간이 참으로 같이 사" 이 우주가 되어야

지난 1월 24일 한남동에서 교수님들이 모여 가지고 새로운 결의를 하고 대 사회활동을 시작했고, 2월 17일부터 18일까지는 대 사회강연이라는 놀라운 역사적 페이지를 기록했습니다. 또, 그로부터 5개월 이후에는 세계 석학들을 중심삼고 일본 교수들과 여러분들이 협력하여 한국 땅에, 한국 천지에 있어서 역사적인 뭐라고 할까요, 새로운 말씀의 포문을 열었다는 사실, 이것은 세계를 넘어서 역사를 두고 기념할 수 있는 하나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 더우기 고명하신 학자님들이 동원됐다는 사실, 그 배후와 그 인연된 내용은 어떻든간에 학자들이 선두에 섰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을 기해서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타이틀이 상당히 길어요. '전국대학교수학생남북통일운동연합', 이거 글자로 열 여섯 자라구요, 열 여섯 자. 앞으로 이것을 무엇으로 약해 부를 것이냐 하는 것은 여기 교수님들이 전문분야에 있으니까 간단하고도 알기 쉽게 대표적인 글자를 추려 가지고 이런 운동을 제기해 가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많은 희망을 본인이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이제 나이 칠십이 가까와 온다구요. 한국 나이로 보면 예순 일곱이거든요. 이제 3년이 지나면 칠순인데 칠순 노인이 사회의 선두에서 뭘하겠다고…. 학자님 세계에서도 그렇지요. 요즘 정년이 얼마예요? 오십 오 세인가요? 「육십 오 세입니다」 육십 오 세. 육십 오 세면, 육십 오 세 이상 넘어 가지고 어떠한 단체의 선두에 선다든가, 사회적인 지도체제 앞에 선다든가 하면 규탄받는 것이 사실인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지금도 쭉…. 나도 이제는 정년이 되어서 후퇴해야 될 텐테도 불구하고 오늘 저녁에도 할 수 없이 끌려서 이렇게 나와 가지고 여러분, 고명하신 교수님들 앞에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되어서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용납해 주길 부탁드립니다.

교수님들은 지금까지 교단에서 말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도 일생 동안 말하고 살았지만 교수님들은 각 학과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삼고 연구하면서 지금까지 가르쳐 온 주체자들이기 때문에, 말을 지금까지 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런 양반들이 말하는 내용은 체계를 갖추어야 되고, 원고를 써 가지고 전후가 맞아야 된다는 관을 갖고 있지만 나는 오늘 저녁 여기서 하나의 반동분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체계도 없이 두루뭉수리로…. 여러분, 범벅떡 있지요? 떡 중에서 시루떡보다 범벅떡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아시고, 또 시간 있는 대로 느끼는 대로 한번 얘기해 보자구요.

그래서 대개 골자를 추려서 얘기하는데, 제목을 잡는다면 '우리들 참으로 같이 살고 싶구료' 그런 내용인데, 제목이 이상스럽지요? 자,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좀 해보자구요.

여러분 중에 가정을 안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가정을 가지면 부모를 모시고 그 다음에는 처자를 거느리는 이런 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그런 가정을 중심삼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가정과 같이 살고 싶구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이거예요. 더 나아가서 우리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어버이 대신 대표로 모실 수 있는 하나의 주권자를 중심삼고 그 나라의 백성들이 '그대와 더불어 우리들 진정 같이 살고 싶구료' 할 수 있는 국민과 혹은 국가 지도자가 얼마나 있었느냐? 이렇게 묻게 될 때, 이 범위를 넓혀 가지고 세계적으로 확대시켜서…. 그러면 이 세계를 중심삼고 하나의 어떠한 중심존재가 결정되어 그 중심존재와 더불어 '우리들 참으로 같이 살고 싶소' 그럴 수 있는 세계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대우주를 창조하신 대주재 되시는,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있다 할 때 하나님과 이 피조세계는 물론이고, 거기에는 인간은 전부 다, 과거의 인간, 현재의 인간, 미래의 인간이 전부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들이 같이 살고 싶구료' 할 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게 수수께끼입니다. 하나의 숙제면 숙제고, 우리가 숙원으로써 숙명적으로 바라는 희망이라면 희망이 아니겠느냐?

이러한 명제를 놓고 다시 돌아와서 자기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때, '나는 진정히 가정과 더불어 같이 살고 싶어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부모와 친족이 같이 살고 싶어했느냐 할 때,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 생활을 넘어 생애의 노정을 통해서 '그랬소' 할 수 있는 가정이 있다면, 이는 세계의 가정이 추앙하고 기념할 수 있는 대표자가 될 것이며 이름이 날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면 부모로서, 아버지면 아버지로서, 어머니면 어머니로서 그럴 수 있는 생활을 하고, 그 부모가 그럴 수 있는 생활에서 중심이 되어 가지고 가정과 더불어 그렇게 살 수 있는 가족이 됐다면 그 가정은 과연 행복한 가정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이 큰 문제이기에, 나와 상관없는 문제 같지만 이것은 직접 나와 너와의 생활무대에서 필연적인 운명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생활의 터전이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한 운명적인 생활 자체를 영위해 나가는 내 자신이 거기에 책임질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 있느냐?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열 명의 식구 중에 과연 우리들과 더불어 같이 살고 싶어서 사는 사람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열 식구의 생애노정에 있어서 잊어버릴 수 없는 형님이면 형님, 부모면 부모, 누님이면 누님으로서 식구들 마음속 깊은 가운데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그리움의 주인공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효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 효자가 뭐냐? 어버이와 더불어 언제나 같이 살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사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여기서 공통분모가 뭐냐 하면,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고의 역사가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제거시켜 놓고 변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운데 모셔 놓고 변하는 것을 원하지, 이것을 부정해 놓고 변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가정에 있어서 왜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효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가정에서 어느누구든지 같이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냐. 마음으로도 그렇고, 생활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오관을 통한 느낌의 모든 생활권까지 그렇고, 깊은 심정의 내면까지도 같이 살고 싶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