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집: 너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 1960년 04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8 Search Speeches

인간의 욕망과 타락

지금까지 예술은 인생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개척하고 개척하여 무엇을 제시하고자 했던고? 내적인 세계의 미를 상대적으로 느껴 그 본연의 가치를 백퍼센트 외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예술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여지는 자연을 품고 기뻐한 적이 있었습니까? 산수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인간이여, 이것을 보소서. 하늘이여, 당신의 창조의 묘미가 놀랍소이다'라고 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다 할진대 여러분은 절망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탄식이 생겼는데, 그 탄식은 인간에게서 그친 것이 아니라 천상과 지상의 온 피조만물에게 미쳐졌다고.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많지만 그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자연심입니다. 욕심이 아니라 자연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정적인 지역에 갇혀 있으니 이것을 터치고 나아가자는 것은 자연적인 발로입니다.

인생의 욕망은 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덩이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 인간과 더불어 화합하고 전체의 가치를 의논하며 주체되는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와 더불어 상대적인 가치를 노래하고 그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마음은 달립니다. 우리의 심정과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온 천주를 품고 싶은 욕망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본궤도에서 이탈하였기에 그것을 대하지 못하고 취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근본원칙에 따라 취할 수 있는 한때가 있기에 우리의 마음은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여 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에서는 두 갈래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행복을 느꼈다 할지라도 그 행복을 내일도 모래도 생애 내내 지속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오늘 사랑하는 사람을 붙들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중심삼고 영원히 행복을 노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가치적인 그 무엇도 존재세계 앞에 영원히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인 것을 여러분이 시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몸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이 마음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이 심정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있어야 할 자리를 갖지 못하고 태어났습니다. 안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지 못하고 태어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싸움의 환경에 떨어진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누가 저끄러 놓았는지도 모르고, 누가 엉클어 놓았는지도 모르는 환경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 하나 해결하기 위해서 인륜도덕이니, 도의 길이니 하는 것들이 나왔고, 이것을 넘고 넘어 나중에는 이 땅위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하늘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갈래야 갈 수 없는 환경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이, 우리가 태어나 살아오면서 형성된 생활적인 관념이나 인식이 우리를 묶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알 수 없는 어떤 죄악상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딸이뇨? 여러분이 악한 세계의 아들딸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악한 세계의 아들딸이예요. 선을 그리는 마음은 있으되 선한입장에 처하지 못하고 악한 입장에서 탄식하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악한세계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를 결론지어 말하기를 타락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 타락이라는 두 글자에 걸린 인생이니, 타락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죄악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