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집: 나 1963년 02월 0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17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 선이나 인간 출발의 동기" 악

'나'라는 것인 상대적인 인연 가운데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벗어나게 되면 주체도, 나를 중심삼은 절대적 주체가 되어야 할 그 주체도 나로 말미암아 무가치하게 되는 거예요.

이런 견지에서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도 오늘날 동기와 결과의 그런 세계를 향하여 섭리하시는데, 여기에선 이건 몰락적이예요. 전부 다 이 세계는 원치 않아요. 여기는 기쁨이 아니예요. 기쁨이예요? 기쁨이 아니예요, 슬픔이예요.

인간시조가 생겨난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부부가 기쁨의 부부가 아니예요. 기쁨의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기쁨의 가정이 아니요, 기쁨의 가정이 아니니 기쁨의 사회가 아니요, 기쁨의 사회가 아니니 기쁨의 국가가 아니요, 기쁨의 국가가 아니니 기쁨의 세계가 아니예요. 기쁨의 세계가 아니니 기쁨의 하늘땅이 못 되어 있으니 하나님도 결국은 슬픔의 하나님이 된 거예요.

그러면 슬픔으로서 끝나는 것이 우주의 창조의 동기냐? 아니예요. 동기는 그렇지 않아요. 동기는 기쁨이었어요. 어머니가 뱃속에 어린애를 밸 때 `오, 이놈의 배야! 어찌하여 불러지느냐?' 해요? 어떤가요? 슬픈가요, 기쁜가요? 저 아저씨들? 아주 뭐 뜻 깊은 이런 가운데 `임자가 아니면 내가 죽고 내가 아니면 임자가 죽지' 하는 거예요. 둘이 하나요, 하나가 둘일 것인데, 당신을 봐도 나 같고 나도 당신 같은데…. 그 가운데 복중에서 애기씨가 자라 움직이고 자꾸 커지는 복중을 바라볼 때 그의 어머님이나 아버님이나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리 병신이라도….

내가 한번 이런 일이 있었어요. 보면 말이예요, 팔은 곰배팔이요, 입은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져 있고, 눈은 병신 눈인데 길을 걷는 것 보면 이건 뭐 요지경이고 그래요. 팔도강산 유람하는 가지각색 이상이예요. 아주 뭐 그거 연구하면 참 재미있는 재료가 많이 나올 수 있는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또 그런 마나님이 있거든요. 마나님이 그렇고 영감은 또 소경이고 이런 패들. 이들이 부처끼리 다니면서 복중의 애기를 대해서 `영감도 복중에 애기가 있는 거 좋아합니까? ' 하면 `허허, 그거 나도 모르게 마음이 궁금하게 좋네' 하고 그 여자도 그렇게 병신이지만 `복중에 들은 그 애기를 생각하면 기쁩니까? ' 하면 `기쁘고 말고' 합니다. `당신 같은 아들딸 낳으면 어떻게 되겠오? ' 하면 그건 생각도 안 하고 하여튼 좋다는 거예요. 그거 그런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복중에서 태어나는 걸 가만히 볼 때 누구나 불문하고 부모의 입장에 선 사람은 다 좋아하게 되어 있어요. 총각들은 모를 거예요. 한번 시집 장가 가 보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 뭐라고 설명은 하지 못하지만 동기는 좋아서…. 그런데 낳아 놓고 보니`아이코!' 낳고 보니 슬픈 세상에 태어나게 된 그게 한이예요.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인간을 창조할 때 슬픔에 잠겨 `아이고, 이거 이놈의 세상! 드디어 이거…. 아이고, 가슴이야! 아이고, 큰일났구나! 아이구, 슬픔이야!' 하며 눈물 줄줄 흘리기 위해서 지었겠어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짓는 모든 전부에는 자기 정열이…. 한 가지 짓고 두 가지 짓고 세 가지 짓고 천천 만만의 수가 앞으로 나감에 따라 가지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정이 통하고 하나님의 심정이 흐르고, 심정이 흐를 뿐만 아니라 자기 개체가 후닥닥 사정없이…. 맛으로 말한다면 최고의 맛인 거예요. 호랑이들이 아주 굶주린 가운데 토끼새끼 갖다 대면 확 삼키는 그 이상 굶주린 자리에 있었으니 아주 맛있는 진수성찬을 갖다 던지는 것보다더….

그러한 기쁨이 거기에 숨어 있어야 하나님도 그 어려운 창조의 창업을 전부 다…. 그럴 거 아니예요? 만일에 하나님이 있으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지었느냐? 슬퍼서 지었느냐? 슬퍼서 짓는 하나님이라면 벼락을 맞을 하나님이예요. 그럴 거 아닌가 말이예요. 하늘은 어떤 하늘이냐? 이 창조주가 있으면 창조주는 출발 당시에서부터 슬픔의 동기을 가졌다면, 그 슬픔의 동기를 가진 하나님이라면 인간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어요. 원수예요.

이걸 생각할 때 어디까지나 선, 선을 찾아야 돼요. 선을 위주로 한 이러한 원칙의 논리는 부정할 수 없는 거예요. 안 그렇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동기는 선해요. 동기가 선하였으니 과정도 선하고 과정이 선하였으니 목적도 선해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그런 입장에 섰더라면 인간은 고통 가운데 살 것이 아닌데…. 여기에서 동기는 선이었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창조의 동기는 선인데 인간의 생활의 출발과 생활의 동기는 선에서 출은? 악!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동기와 출발은, 생활적인 동기와 출발은 악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기쁜 날로 시작했느냐, 슬픈 날로 시작했느냐? 슬픈 날로 시작했다 이거예요. 인간의 동기가 슬픈 날로 되었으니, 슬픈 날로 시작했으니 슬픈 자신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슬픔은 가정적인 슬픔으로 옮겨가고 가정적인 슬픔은 민족적인 슬픔으로 옮겨가고 민족적인 슬픔은 국가적인 슬픔으로 옮겨가고 세계적인 슬픔으로 이렇게 갈라져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의 최후에 승리할 수 있는, 역사도상에 있어서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기쁠 수 있는 하나의 주권을 되찾는 그날이 와야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겠느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어디서부터 출발했다구요? 「악에서 출발했습니다」 악에서 출발했고, 무엇으로부터? 슬픔으로 시작했으니 인간은 세계성을 띠고 인간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세계적인 인연을 가져 가지고 하나님의 대창조의 목적과 더불어 관계의 도상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본성적인 창조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을 떠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개체로부터 시작한 것은 세계성을 반드시 걸어 놓고야 해결지어 나가기 때문에 개인적인 슬픔과 개인적인 고통과 개인적인 죄는 가정적으로 벌어지고, 가정적인 슬픔은 종족적인 슬픔으로, 종족적인 슬픔은 민족적인 슬픔으로, 점점 커 나가는 거예요. 민족적인 슬픔은 세계적인 슬픔의 단계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