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집: 우리의 책임 1972년 06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12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내적 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그러면 오늘날 우리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지금의 때는 어떤 때냐? 지금은 종족으로부터 민족을 이끌어 가지고 넘어가야 할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그 당시에 있어서 유대교 앞에 몰리던 입장을 다시 탕감하여 가인적인 유대교 일당을 대하여 아벨적인 예수의 일파가 하나되어 가지고, 가인 아벨로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시대적인 자리를 이어받은 때가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3년노정을 중심삼고 통일교회와 기성교회가 예수의 일파와 유대교가 합하는 역사적인 사명을 재현시킨 자리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 현재 통일교회가 이어받은 책임을 짊어진 자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현재의 통일교회의 아벨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것도 좋고, 기성교회와 인연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내적인, 심정적인 기준을 가지고 유대교를 대하던 예수님의 비장한 심정과 그들의 반박을 받던 고충된 심정을 어떻게 여러분이 다시 재현해 가지고 체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전체, 근본 탕감을 해드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오늘날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서서 유대교와 예수의 일파가 탕감복귀되기를 바란다면, 예수를 위주해 가지고 그것이 재현되기를 바라지 예수를 남겨 놓은 주위에서부터 재현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것은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하는 유대교를 대해 가지고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 하고 7화(禍)의 저주를 퍼붓던 예수의 사정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던 때와 엇갈린 결과에 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여러분들도 이러한 자리에 선 것이 아니냐?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저주의 말을 퍼부을 수 있는 자리에 선 예수의 입장이라는 것은, 마음 세계에 있어서 그 누구도 그려 갈 수 없는 갖은 수난길을 극복해 나온 자리에 서 가지고, 다만 예수 홀로 하늘을 위해 있고 하늘을 위해 나오는 그 터전을 완전히 이어받아야 할 유대교가 반대의 입장에서 하늘의 터전의 중심인 자기 자신을 여지없이 몰아내게 될 때에 하늘의 슬픔이 사무치는 것을 느끼는 자리였습니다. 그러한 예수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슬픔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7화(禍)를 퍼부은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염려하고 하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한 말은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효성의 도리를 다 하고자 하는 예수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뜻이 남아질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지되는 과정에서는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 정지되는 마당에서 당한 십자가의 최후에 있어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했다면 모든 것을 다 끊어 버리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뜻이 남아지는 자리가 아니라고요. 뜻이 결단을 봐야 할 입장에서 예수가 '내가 천만번 죽더라도 뜻을 남겨야 할 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감안하게 될 때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쌍한 처지의 예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구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보다 나은 자리에 서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보다도 외적인 면에서는 나은 자리에 선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도 예수를 능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예수를 능가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삼고 편답하던, 즉 전도 노정에 나섰다 할 때, 그 전도노정 이상을 내가 더듬어 와야 할 책임이 있지 않느냐? 그 전도길에 있어서 예수님이 하늘을 위하여 밤잠을 자지 못하고 제자들을 키워 나가던 그런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갔으면 내가 그런 하나의 터전을 넓히기 위해서 예수 이상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밤을 새울 수 있는 내 생애로 이어받아야 될 것이 아니냐? 이런 놀음을 여러분이 자체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다시 일깨우지 않고는, 그런 운동을 하지 않고는 그때 당시 수난과 고통 가운데서 개척자의 선봉에 서 가지고 나가던 예수의 내적 사정을 해원성사해 드릴 수 있는 제자, 혹은 그누구보다도 가까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해원성사해 드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