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집: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 1972년 07월 3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11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사'을 완전히 받지 못한 예수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가 와서 '선생님이여,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만나자고 합니다' 하니, 예수님은 '내 모친과 내 동생이 누구냐.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내 모친이요. 내 동생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경지의 말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이상적인 주체 앞에 이상적인 상대로서,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본래의 이상의 남자의 길을 가려 하는 예수에게 있어서는 부모와 동생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끼리끼리의 정을 중심삼고 '여기서 같이 살자' 하는 어머니와 '형님, 우리를 버리고 어딜 갑니까? 우리와 같이 있습시다' 하는 동생은 하나님의 사랑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말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추려 말하자구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진정한 의미에서 남자를 사랑해 봤느냐? 하나님은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남자를 사랑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 사랑해 봤느냐? 예수님 자신은 이땅에서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갔느냐? 남자로서 다 못 받고 갔습니다. 못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이 하나님의 사랑 이상이예요? 예수님의 사지백체를 바라보면서 그야말로 내 사랑 중의 사랑이라며 이상적인 하나님을 중심삼은 기쁨을 노래할 수 있고, 사랑의 노래를 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내 사랑이라고 하며, '너와 나는 영원히 그 무엇이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리에 섰노라. 여기에 순응하지 않은 자는 용서할 수 없다. 몽땅 내 사랑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을 받고 갔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랑을 받고 갔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에 땅땅 박혀 피를 흘리고 신음하면서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말이 예수가 목적을 이루었다는 말이예요? 그 말은 '당신의 소원은, 그러한 이상적인 기준 앞에 내가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으로서 기뻐하기를 바란 것이요, 기쁘게 되어야 할 것이 내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이와 같은 자리에 선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은 어찌하여 본래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에서 나를 맞아 주는 당신이 되었습니까' 하는 말이라구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구상하는 이상적인 남성, 완성한 남성으로서 완전히 갖출 수 있는 하나의 상대권을 이루어 몽땅 사랑할 수 있는 권을 못 가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한 그 남성을 맞이했다면 어떻게 하셨겠는가? 하나님이 몽땅 사랑하는 여성을 보내 그 남성과 맺어 줄 것이 아니냐?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하나의 남성의 사랑을 다 이루었으면 '남성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하는 전통을 여성으로 하여금 이어받게 해 가지고 그 전통 앞에 일치될 수 있는 여성을 맞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자는 오른팔이요, 여자는 왼팔로서 손에 손을 잡고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이런 모습이다. 부부의 사랑은 이런 모습이다. 너와 나와 하나된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들 입장도 나와 너희들 사이와 같은 입장이 아니냐. 이것이 남녀를 중심삼은 이상적인 부부의 사랑의 기원이다. 원칙이다. 전통의 출발이다'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런 남자와 여자를 몽땅 품고 하나님이 이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취해서 다 주더라도 이것만이 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해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해봤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 남성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이 땅 위에는 메시아 사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