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집: 작금의 우리의 가치 1969년 12월 1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89 Search Speeches

탁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 사람

개인을 중심삼아 가지고 가려면 언제나 투쟁해야 됩니다. 내적인 투쟁을 통해서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내 일선을 투신한다' 하고 나서야 됩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시련을 극복하고 나서면 가정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입니다. 가정의 반대에 부딪칠 것입니다. 지금까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 나오던 식구들이 `시련패'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시련 가운데서 어떻게 될 것이냐? 여러분의 부모가 가로막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처자가 가로막을 것입니다. 형제가 가로 막을 것입니다. 가로막다가 안 되면 칼을 들고 나설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길을 따라오면서 칼침을 맞은 사람도 많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별의별 반대를 다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반대를 했고, 형제간에도 별의별 반대를 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아비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한 것입니다.

세계화 운동을 제시하던 예수님 앞에 가야 할 시련의 무대가 일시에 등장하였습니다. 나타나는 개인도 시련의 도장이요. 가정도, 종족도, 민족도, 세계도 시련의 도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련의 도장에게 패자가 될지도 모를 입장에 놓인 예수님은 최후의 운명에 봉착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청산짓는 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였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웠느냐? 30여 년 동안 공적인 뜻을 따라나온 그 생애는 무엇을 중심삼고 산 생애였느냐? 나는 내 일신의 행복을 위해 살았느냐? 아니다. 내 일신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위해 살았다. 하나님권내에 남아질 수 있는,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위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있는 나를 위주로 하여 그 한계를 넘지 못할 때에는 내 뜻과 그러한 나라를 세우려는 아버지의 뜻은 별개가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뜻이 부딪치는 순간 마음의 결정을 지어 가정을 중심으로, 민족을 중심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중심으로, 판결짓고자 했던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결판 과정에서 아버지의 뜻을 붙안고 죽었기 때문에 사망권이 그를 주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죽음에 몰아넣더라도 사망선을 넘어서 재차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입니다. 이렇게 부활된 사람은 새로운 의미의 개인이 됩니다. 모든 한계권내에서 있어서 제재를 받는 개인이 아닙니다. 한계권을 초월한 개인이 됩니다. 가정의 한계권, 종족의 한계권, 민족 국가 세계의 한계권을 넘은 자리에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을 중심삼고 따라가는 사람은 인간세계에서 느끼던 모든 행복, 인간세계에서 느끼던 결의 이상의 힘을 가지고, 흐르는 대해와 같은 탁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길을 걸어 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상속받아야 할 기독교인들은 재차 정비해 가지고 부딪쳐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이요, 현시점의 수많은 종교들이 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도피하려고 하는 종교들은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망하지 말라도 해도 망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빙자해 가지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자기 일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활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