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집: 참을 찾아서 1970년 12월 1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87 Search Speeches

선의 주체

여기에서 마음이 선한지 몸이 선한지 알 수 없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몸을 중심삼고 마음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잘 했느냐 못 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느냐 안 받느냐,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스스로 묻게 될 때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 양심의 가책을 안 받는다고 할 때는 당당합니다. 천하가 뭐라 하더라도 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어떤 최고의 위협적인 존재가 내게 직접 부딪친다 하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없을 때에는 무한히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한계점은 어느 권까지 갈 수 있느냐? 대한민국의 어떤 중심 존재가 부정하라고 해서 '예' 라고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중심존재라가 부정하라고 해도 '예'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천지의 중심존재가 부정하라고 하더라도 '예'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러더라도 '아니오'라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도 더 높은 분이 있다고 하면 그분 앞에 가서도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그 권은 절대적입니다.

마음이 잘못을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든 선생님이든 어느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토벌해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에 반하고 나서면 이놈들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도 이놈이요, 스승도 이놈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 이기려고 합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리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거기에는 절대적인 권한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내재되어 있는 권한이 찾고 있는 가치는 어떠한 가치일 것이냐?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사연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이 내 몸이냐, 마음이냐 묻게 될 때 몸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중심이냐? 그것은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친구라고 하는 것은 양심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친구가 미인이기 때문에, 미남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사람 있어요? 양심적이기 때문에, 순수하기 때문에, 희생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다고 할 수 있는 바탕, 혹은 그 내용이 무엇이냐? 순수하고, 솔직하고, 거짓이 없고, 희생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자기만을 위하고, 강압적이고,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친구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달게 받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사실은 사람에게 교육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대학교의 교양이니 뭐니 하는 것들 다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할 때는 '야, 너 왜 나쁜 일을 하니'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 이상의 교육이 있습니까? 본래는 교육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세계의 끝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부터 해결됩니다. 여러분의 생활권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백 퍼센트 구비되어 있고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