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집: 참된 중심 1968년 05월 19일, 한국 마산교회 Page #263 Search Speeches

참된 인간이 되려면 참의 모체를 찾아야

오늘날 인생 자체를 두고 볼 때, 그 자체에서 둘이, 서로서로가 싸우는 내 개체가 참된 자리에 서 있느냐? 참되기를 바라는 자리에서 참을 차지했더라도 참을 관리하고 참과 일치될 수 있느냐? 일치 못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외적인 세계에서 참을 추구하기 전에 종교적 분야에서는 무엇을 추구하느냐? 내적인 자아를 중심삼고 참된 기준을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문제예요. 종교는 이것을 강조해요.

하나님도…. 만약에 신이 계시다면 신은 무엇을 강조할 것이냐? 대외적인, 상대적인 세계에 있어서의 참된 기준을 세우는 것보다도 우리 개체의 마음을 중심삼아 가지고 참된 기준을 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상대적인 이 세계에 있는 것보다도 네 마음에 있다'고 했어요. 네 마음에 있다 이거예요. 마음이 참되게 되면 참을 중심삼고는 전부가 통일이 되는 거예요. 참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자체를 동경하고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자체를 중심삼고 전부 다 연결되어 가지고 하나돼요.

그러면 천국이라는 곳은 어디냐? 참의 중앙본부인데, 참의 주권이 임재할 수 있는 곳인데 그런 곳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될 수 있는 그 모체를, 한 동기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 발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이 결과적인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기 될 수 있는 인생 자체, 개체에 있어서의 내 심중에 참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느냐 이거예요. 즉 말하자면 여기에 비로소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 참의 어떠한 모체를 지닐 수 있느냐? 이것을 지닐 수 없다면 아무리 상대적 세상에서 참을 추구해도, 그 참을 우리가 만나더라도 나와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선과 악이 상응이 아니라 상극이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투쟁할 수 있는 상극적인 요소를 지녀 가지고는 참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생이 참으로 간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어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 인간 가운데…. 그러면 세계 30억 인류를 헤쳐 보면 전부 다 몸을 중심삼고 있어요. 전부 다 대동소이하다 이거예요. 동양 사람이든 서양 사람이든 마음과 몸이 서로 상극이 되어 가지고 투쟁하는 것은, 싸우는 것은 전부 다 마찬가지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인간세상에 있어서 참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모순이 아니냐 이거예요. 이렇게 볼 때, 그러면 참이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가 문제 되는 거예요. 참이 어디 있느냐 이거예요. 그러면 보편적으로 말하면 말이예요,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참이라고 하는데 그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 참이라면 그 양심적으로 산다는 입장을 두고 볼 때에, 그렇게 사는 자체가 진정한 참된 중심이 될 수 있느냐?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참을 추구하게 될 때 오늘날 이와 같이 이런 인간들 가운데서는 찾을 수 없겠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간들은 생각해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생각해 내서 찾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찾지 않을 수 없어요. 인간으로서는 참을 찾을 수 없다, 참된 나를 찾을 수 없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서는 참을 만들 수 없어요. 참이라는 것을 유치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 이상의 절대적인 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절대적으로….

오늘날 같은 인간끼리 여기에서의 둘이 싸우는 입장에 있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참되려면 하나돼야 돼요. 몸과 마음이 하나돼야 돼요. 그렇지요? 참은 변하는 것이 아니예요. 몸과 마음이 싸워서…. 인심은 조석변이라고 그래요. 옛말에 인심(人心)은 조석변(朝夕變)이요, 산색(山色)은 고금동(古今同)이라는 말도 있어요. 이 자연은 변하지 않는데 만물의 영장이 이렇게 변한다 이겁니다.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어요. 영장이 되려면 반드시 산색이 고금동이듯이 고금동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인격의 불변의 그 모체를 가져야 참이 된다는 걸 아셔야 돼요. 보물이라는 것은, 참된 보물이라는 것은 변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변하는 입장에서는 참이라는 기준을 세울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참은 변치 않는다 이거예요.

인간 자체 내에서는, 인간 자체 내에서는 참이라는 것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그러한 중심존재가 있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이것이 종교의 기원, 출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절대자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절대적인 그러한 참된 중심이 있어야 된다 이거예요. 우리 인간에게는 어차피 참이 필요해요. 변하지 않는 것을…. 우리 식구들끼리라도 `참되었어. 참사람이야, 참된 사람이야. 옳은 사람이야'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의 갖춘 내용이 무엇이냐?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음과 동시에 거기에는 반드시 상하관계에 있어서의, 질서적 관계에 있어서의 모순 상충이 없어야 됩니다. 이렇게 될 때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참된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 인간 가운데서, 모순 상충이 벌어지고 변하는 이런 입장에 선 사람 가운데서는 참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왜? 이렇게 변하고 이렇게 참되지 못한 자리에 선 이 인간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이것이 타락된 결과라는 거예요.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이거예요. 동기, 동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이거예요. 결과로서 우리 사람은 싸우는 사람이 되었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싸우는 사람을 가지고는 영원히 하나될 수 없는 거예요. 완전한 것으로서 설 수 없는 거예요. 완전한 것으로 설 수 없으면 이 우주의 자연 공법은 반드시 이걸 지배해 가지고 제거시켜야 돼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에 있어서의 참된 주체를….

참된 주체! 참된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30억 인류 가운데에서 보게 될 때, 30억 인류를 중심삼고 볼 때 이 30억 인류 가운데서 참된 사람이 있다고 하자구요. 혹은 어떤 동네에 있어서 `아, 이 동네에서 지극히 참된 사람이 누구냐?' 할 때 `아무개다' 하게 되면 그 아무개가 그 동네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대표적인 중심이 될 수 있느냐? 그럴 때 '그건 나는 몰라'한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그러면 참된 사람이 있으면 그 참된 사람이 세계 만민을 중심삼고 과거 현재 미래를 대신하여 참된 중심이 될 수 있느냐 이거예요. 있었느냐, 있느냐, 있어야 되겠느냐 하는 문제도 심각한 문제예요.

오늘날 인간들이 지금까지 성현들의 교훈을 중요시하는 것은 왜냐?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참된 것을 찾기 위해서 그렇다는 거요. 여러분의 스승도 조금 좋은 스승을, 이 갑이라는 스승보다도 을이라는 스승이 조금만 좋으면 그 스승을 따라가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 따라가겠다는 욕구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참에 접근할 수 있는 욕망에서 기인한다 이거예요. 우리 부모가 좋다 나쁘다 하는 그것도 무엇을 중심삼고 결정되느냐? 참에 가까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좋다 나쁘다가 결정됩니다.

어디까지나 참된 것은 변하지 않는 거예요. 참된 것은 남한테 타협당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언제나 주체성을 가지는 거예요. 타협하는 거예요, 타협시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참된 사람이 있으면 그 세상에 있어서 이러한 싸우는 판국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수련시켜서 자기가 주체성을 지녀 가지고 중심을 결정하는 놀음을 한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4대 세계적인 성인 같은 사람들은 참된 그 권내에, 그 한계에 해당할 수 있는 권내에 있어서의 참된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 입장에 서 가지고 나오면서 타협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체적인 입장으로서 타협시키는 놀음을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