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집: 통일교회 활동과 학자들의 사명 1980년 11월 17일, 한국 서울 롯데호텔 Page #167 Search Speeches

한국이 살려면 일본을 -고 미국을 -결시켜야 돼

여러분이 알다시피 일본에 우리가 선교사업을 개척한 때가 1958년입니다. 1958년도라구요. 그때는 자유당 치하여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절대 반대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북에는 김일성을 중심삼고 소련과 중공이 후원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이 난국을 해결할 하나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일본을 뚫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활동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당시에는 한일간에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치하에 있는 한 국민으로서 일본에 선교사를 투입하게 될 때, 밀항선을 태워 가지고 투입시켰습니다. 이것은 국가적인 견지에서 보면 위법입니다. 위법인 줄 알았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10년 20년 후의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을 열어 주는 데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밀항선을 태워서 일본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더니 가던 도중에서 체포당해 송환되어 버렸어요. 그래 2차 3차까지 계속해서 일본에 투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차 때까지도 체포당했어요. 그래서 할수없이 오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거기서 뛰쳐 나와 도주해 가지고 개척한 것이 일본 선교의 터전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을 닦으면서, 대한민국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종교이념이라든가 사상을 지녀 가지고 일본 국민을 중심삼은 문화적 중심 도시에, 혹은 중심 터전 위에 어떻게 토착화되느냐? 어떻게 토착시키느냐? 이게 문제였습니다. 일본 내에 가서 규탄받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을 교화해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토착화 될 수 있느냐? 그것만이 미래에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일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일본으로 선교를 갔던 그 청년은 일본에서 피신하고 있는 몸으로서 통일교회를 개척해 가지고, 그야말로 새로운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국민적인 운동보다도 어떻게든지 일본 위정자들 앞에 길을 뚫으려 했습니다. 이런 것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한국이 살려면 반드시 일본을 업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만 업어 가지고도 안 된다구요. 반드시 미국을 어떻게든지 연결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일본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우리 통일교회는, 자위대를 대한 활동을 지금부터 15년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자위대 대한 활동, 이건 지금까지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예요. 15년 전부터 자위대에 젊은 사람들을 투입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각료급에서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 기반을 닦기에 주력했고, 또 자민당 고위층과 연결시킬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기시 수상 때면 기시 수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배후공작을 치밀하게 해 나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민당의 원로급들까지 어느 정도까지는 선(線)을 다 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위대와 자민당 위정자들과 연결시키는 놀음을 하면서 일본 경찰을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는 활동을 해 나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