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집: 내일을 맞자 1971년 02월 2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96 Search Speeches

현실을 극복하려면

만일 이러한 기반을 여러분 자체가 형성하지 못하게 되면 여러분은 주체도 되지 못하고 대상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렇게 주체적인 입장에 접할래야 접할 수 없고 대상의 입장에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되면 반드시 여기에서 해이한 입장을 모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입장에 서기 쉽다는 것을 매일매일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권내에서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를 중심삼고 과거가 주체가 되고 있느냐, 현재가 주체가 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가려 봐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형성되지 못할 때에는 미래를 소망의 주체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소망을 중심삼고 그것을 주체로서 모실 수 없는 해이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과거를 주체로 삼고 현재를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그대로 흘려 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길을 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해이할 때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럴 때는 과거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주체로 삼아서 오늘 현실적 환경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거 은혜 생활을 하던 때에 기록한 일기를 다시 보거나 기도 가운데서 체험한 것들을 다시 한 번 회상한다든가 하여 그때의 심정을 재생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행한 것을 다시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과거보다 자극적인 입장에서 결의해야 할 것입니다. 정도는 낮을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심정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어떻게 자기몸에 그때의 체험을 재현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몸부림을 치지 않고는, 오늘 여러분이 해이한 그 입장을 해결할 방안이 없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뜻을 대해 가는 데 있어서 교회 전체를 대표한 입장에 있는 주체, 진리적인 측면에 주체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주체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상대적인 인연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자기의 과거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비교해 볼 때 과거가 오늘보다 낫다면 그 과거의 생활을 현재의 생활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때 가졌던 결의를 어떻게 다시 한 번 스스로 모색하느냐, 그때에 느끼던 심정을 어떻게 다시 한 번 체휼하느냐, 그때에 내가 싸워오던 환경을 어떻게 다시금 재현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자기 스스로 기도 가운데서 해결되지 않으면 행동적인 면에서라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 뜻길을 가면서도 교회와 격리되기 쉽습니다. 교회와 나를 두고 볼 때 교회 안에 있는 내가 아니라 나 자신을 중심삼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를 중심삼고 교회 앞에 있는 나 자신이 되지 않고 교회와 격리된 입장에 있는 제삼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교회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교회에 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자극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와 자기와의 관계가 점점 희박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교회생활이 해이해지는 입장에 아니 떨어질래야 아니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금년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 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교회 전체를 대신해서 주체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그 활동에서 여러분 자신이 고립되지 말라는 겁니다. 고립된 입장에 서지 말고 주체와 보조를 맞추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보조를 취하며 싸워 나갈 때 선두에 선 사람들이 느끼고 채택하고 의욕을 갖고 있는 환경을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를 대표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입장에도 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의 때를 세워 움직이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관계를 맺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선두의 자리에 서서 나가게 되면 거기에는 낙망이라든가 해이라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과거에 비해 해이한 자리에 서게 됐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서 헤어날 수 있겠느냐? 옛날에 자기가 가졌던 신앙 경험을 자신은 잘 압니다. 그때 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가? 혹은 본부면 본부를 생각했던 마음이 어떠했던가? 선생님을 중심삼고 하늘 앞에 내가 충성했던 때 어떻게 했던가 하는 것을 중심삼고 자신의 상태를 감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감별해서 제 1은 어떻고, 제 2는 어떻고, 제 3은 어떻다는 것을 판결해 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을 희생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도리를 다해 나가며 행동으로 실제 생활에 자신의 과거를 재현시키지 않고서는, 과거의 은혜로왔던 자리를 자체 앞에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해이한 입장에 섰다면 어떻게 하든지 의식적으로 혹은 고의적으로라도 그것을 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과거보다 나을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과거에는 하루에 한 번씩 본부교회에 왔다면 이제는 두 번 이상 다녀가야 합니다. 옛날에는 기도하면 은혜가 되었는데 지금은 은혜가 안 된다면 그때 10분 동안 하던 기도를 20분, 30분, 한 시간 이상 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든지 그때의 마음을 희생시키고 그때의 심정을 오늘에 옮겨 미래의 터전으로서 계승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떨어진 입장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의욕을 줄 수 없을 것이요, 직접적으로 은혜의 손길을 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외로운 입장에서 은혜에 사무친 심정을 가졌거든 그것을 위해 외로운 자리를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혹은 누구보다도 억울함을 당한 자리에 서서 그런 체험을 하게 되었다면 그때 그 체험을 여러분이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기쁜 자리에서 체험했거든 기쁜 마음을 희생하는 자리에서 이것을 다시 한 번 해야 되고, 슬픈 자리에서 체험을 했다면 하나님이 위로할 수 있는 더 큰 슬픔의 자리에 나가지 않고는 옛날 이상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떠한 자리에서 신앙길을 출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출발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외로울 때나 기쁠 때 출발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절망했을 때나 누구와 의논할 때, 혹은 누구를 모실 때나 봉사할 때, 또는 어떤 것을 위해 일선에 섰을 때, 이렇듯 각자 나름대로 출발의 계기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해 나오면서 은혜가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하는 것을 상기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뭇사람 앞에 책임을 중심삼아 가지고 책임자의 위신을 생각하여 뜻을 위한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 보다도 더 어려운 자리에 나가고 억울한 자리까지 몰리더라도 이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물리는 자리가 내일의 슬픔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요, 내일의 갈 길 앞에 있어서 슬픔을 가중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내일의 새로운 은혜를 가중시킬 수 있는 은사의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