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집: 나에 대하여(II) 1983년 03월 06일, 미국 벨베디아수련소 Page #58 Search Speeches

진리의 근본은 참생명과 참사'의 근원된 나

그다음에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하나님도 머리가 있을까요? 하나님도 심장이 있을까요? 「예스」 어떨 것 같아요? 차원은 다르지마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비저블(visible;눈으로 볼 수 있는)이고 하나님은 인비저블(invisible;눈으로 볼 수 없는)이지만 상대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을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있어서의 비저블 바디(visible body;볼 수 있는 몸)가 무엇이냐, 하나님도 비저블 바디가 필요하겠느냐? 필요해요? 「예」 필요하겠어요? 거 어떨까요? 「예스」 왜 '예스'예요? 인비저블한 존재가 있다면 비저블한 존재, 그 상대적인 무엇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인비저블이라는 것이 점점 더 찾아 들어가면 인비저블이 계속될 것이냐? 인비저블이 계속돼 가지고 끝에 가서는 어떻게 될 것이냐? 없어지는 게 아니예요. 끝에 가서는 비저블로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이게 도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 지극히 큰 데로, 지극히 내적인 것에서 지극히 외적인 곳으로 돈다' 하는 개념을 찾을 수 있는 거예요.

인비저블 끝이 무엇이겠느냐 이거예요. 비저블이예요. 우리가 여기에서 인비저블, 인비저블 해서 자꾸 찾아 들어가서 이것이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되나요? 돌아 나와야 돼요. 돌아 나오기 시작할 때는 어떻게 되느냐? 비저블 비저블 해서 큰 데로 가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비저블 세계가 끝이 되면 어디로 가느냐? 할 수 없이 돌아갑니다. 이렇게 되면 큰 비저블 세계도 끝이 있을 것이라는 거예요. 이 우주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큰 세계에 있어서의 끝이 있을 것입니다. 어때요? 그 비저블 세계에 끝이 있을 거 아니예요?

자, 비저블 세계에도 끝이 있고 인비저블 세계에도 끝이 있다는 개념을 찾게 되면, 이러면 어떻게 되느냐?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여기서는 돌 수 있는 길밖에 없어요. 이런 개념을 찾을 수 있다구요. 가다가 끝이 되면 돌아선다는 거예요. 그래, 턴 어라운드(turn around;돌다)하는데 더 작은 것을 바라보고 턴 어라운드해요, 더 크고 좋은 것을 바라보고 턴 어라운드 해요? 「더 크고 좋은 것요」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바라보고 도는 거예요. (웃음) 아무리 돌아다니더라도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받게 될 때에는 좋은 것이다 이거예요. 벨베디아 오기 전보다 여기에 와서 더 좋은 것을 얻었다 할 때는 좋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 운동을 영원히 계속하면서 좋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트루 러브」 그게 진리일 거예요. 이 세계, 우주를 보면 뭐가 중심이냐 이게 문제라구요. 진리일 것이냐, 생명일 것이냐, 사랑일 것이냐? 우주는 세상의 중요한 이 셋을 추려낸다는 거예요.

자, 진리라는 말은 실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예요, 어떠한 실체의 단편적인 것을 말하는 거예요? '진리적 존재다'라는 말은 하지만 '진리존재'라는 말은 안 합니다. '진리적 존재'라는 말은 하지만 '진리다. 진리존재다'라는 말은 안 한다구요. 동양에서는 이치라는 말은 말이예요, 이런 말(理)을 씁니다. (판서하심) 이것은 왕(理의 王)이라는 말이고 이것(理의 里)은 마을이라는 말인데, 이 '리(理)'라는 것은 표시하는 말이지 그 자체의 말이 아니라구요. 표시하는 말이지 자체는 아니다 이거예요. 내 생명한테 트루 라이프(true life;참생명), 참된 생명이라고 할 때, 또 트루 러브(true love;참사랑) 할 때 '트루'가 그 자체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이거예요. 상대적 개념에서 나온 표시와 설명의 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참된 진리 그 자체는 무엇이냐? 진리 자체, 진리가 원하는 그 자체는 무엇이예요? 참된 생명, 참된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 참된 생명, 참된 사랑이 뭐냐 하면, 진리의 근거지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내 자체에 있어서 진리의 근본은 무엇이냐? 그것이 뭐냐? 내 자체, 내게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참생명이 있고 참사랑이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이냐? '나'라는 거예요. 나에게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다면 나라고 정할 수 있다구요.

내 생명은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다구요. 전부 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자, 하나의 나무가 있으면, 거기에 수많은 가지가 있고 잎이 있더라도 그 가지가 다르고 잎이 다를 수 있어요, 전부 다. 잎이 '나는 잎이다' 할 때, '나는 아무개 잎이다. 무슨 나무의 잎이다' 이렇게 말한다는 거예요. '무슨 나무 잎이다. 무슨 나무 잎인데 어느 쪽에 있는 잎이다' 이런다는 것입니다. 방향, 위치를 말하면 '동서남북 어느쪽의 잎이다' 하는 거예요. 여기에는 말이예요, 여기 이 잎에는 뿌리의 요소가 없다, 줄기 되는 요소가 없다, 그런가요? 뿌리 가운데는 줄기가 될 수 있는 성질이 있고 잎이 될 수 있는 성질도 있다, 없다? 어떤 거예요? 「있습니다」 나타나는 표시, 나타나는 입장이 다를 뿐이지 내용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구요. '나'라는 개념 가운데에는 뿌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요? 이렇게 볼 때, 내가 생명과 사랑의 근원의 자리에 있다면 이 생명과 사랑의 진리 자체가 누구냐? '나'라는 개념 앞에 이것을 결속시킬 것이라 이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