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집: 제4회 부모의 날 말씀 1963년 03월 2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04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아"로서 한을 남기고 간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게 될 때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보내는 데 있어서 '나는 진정 너를 사랑하는 부모의 입장에 섰다'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서지 못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독생자인 예수를 이 땅 위에 보내게 될 때에 '너는 내 아들 중의 아들이요 내 독생자 중의 독생자다' 하였지만 과연 그를 품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는 입장에 세웠느냐? 못 세웠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인연이라는 것은 태초에 아담 해와를 중심삼아 가지고 맺어진 것이 연결되어 세계적 무대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라는 이름은 종적인 역사노정에 있어서는 시대적인 차이를 갖고 있으되, 그 명사에는 지난날의 역사를 대신한 현실의 자체들이 지구상에 널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그 부모라는 명사는 아담 해와에게 한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자식을 갖고 있는 부모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세계적인 무대에 이것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해결해야 할 중심 사명이기 때문에 예수를 세계적인 메시아로 세운 거예요.

이리하여 예수는 먼저 택한, 선민을 대표한 전체의 자녀들의 이름을 대신하여 나타났고, 더 나아가서는 이 땅 위에 널려 있는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신자·불신자를 막론하고 전세계 인류의 전체의 자식을 대신하고 이 세계를 대신하여 나타났으니, 탄식권 내의 모든 탄식을 제거 시켜놓고, 이 탄식이 예수의 길 앞에 넘어오지 못하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 놓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본연의 세계의 창조이념의 아버지라, 혹은 부모라 하고 자식이라 할 수 있는 인연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느 한 때를 뚝 잘라 가지고 특별히 '나는 네 아버지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이니 나는 네 아버지다'라고 이렇게 훈계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로서 사랑하셔야 할 하나님이었으나 사랑할 수 없는 독생자의 입장에 세워 놓고 만민을 대 신하여 수많은 불신의 자녀들 앞에, 불의의 부모들 앞에 책임을 다하고 거기에 엉클어진 원한의 이 보따리를 제거하도록 해야 했던 것입니다.

탄식과 슬픔의 보따리를 제거시킨 후에야 비로소…. 인간들 앞에 엉클어진 것을, 원한의 부자의 인연이 엉클어진 것을 예수가 전부 제거해야지, 그 원한의 슬픔이 예수 앞에 탄식의 조건으로 남아져서는 참다운 아들이라 참다운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찾아오게 될 때에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하고 진정 아버지를 불러야 할 예수였으나 부를 수 없는 입장이었어요. 충성을 다하고, 효성을 다하고, 자기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아버지를 한번 모시고 싶고 아버지를 붙안고 '내 아버지!' 할 수 있고, 또 아버지는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이런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 예수의 마음이었으나, 타락의 한이 이렇게 부모의 인연과 역사적인 세계관을 중심삼 아 가지고 엉클어져 있는 연고로 이것을 제거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메시아 예수는 단상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스러웠던 예수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는 이 땅 위에 찾아오게 될 때에 승리한 이스라엘의 왕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요, 뭇 백성이 환호하면서 기쁨의 왕자라고 해 가지고 모실 수 있는 환경에서 나타난 것도 아니예요. 슬픔의 왕자로서 등장을 하였고, 이 이가 가는 길은 고통의 행로로서의 길이요, 이 이가 가는 데는 죽음의 담벼락이 직면하여 부딪힐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이 메시아의 사정을 그 때 사람이 누가 알았겠느냐. 이런 사정을 바라보시는, 예수도 슬프거니와 이런 길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는 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의 날을 기념하고 자녀로서 부모를 대하게 될 때에, 그와 같은 입장에 선 예수가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고, 자신 이 이런 길을 가게 될 때에 아버지께서 고통스러워할 것을 염려하면서 죽더라도 아버지의 염려를 덜어 드리고 싶어 '내가 죽더라도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아버지 뜻대로…' 라고 하면서 안타까워 했던 그 심정 앞에는 무한한 슬픔이 어려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한한 고통과 슬픔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한한 죽음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 있어 가지고, 예수가 하나님을 대하여 심정을 털어놓고, 손을 붙들고 기쁨의 심금을 털어놓으며 '아버지여, 역사적인 한의 길에 있어서 슬펐던 것을 푸시옵소서' 할 수 있는 이런 한날의 기쁨을 세우지 못하고 갔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예수가 이 땅 위에 와서 그런 부모를 대해서 축하하고, 모시고 싶고, 부모 앞에 효도하고 싶어도 땅 위에서 부모 앞에 효도의 길을 승리적인 기반 위에 닦고 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왔다 갔지만 부모의 날이 나올 수 없었다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