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집: 우리들의 표준점 1972년 10월 0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95 Search Speeches

하나의 심정적 기준을 통하지 않고" 이상적인 세계로 못 "어간다

그러면 마음의 주체 되는 것이 뭐냐? 그것이 정(情)이라는 것인데, 정이라는 것은 그냥 막연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가운데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일교회에서는 심정의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에도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마음이 마음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기준이 마음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 가운데 인격 기준이라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심정이라는 것이 둘이 있어요, '심정이다' 할 때의 그 심정? 개인을 중심삼은 심정의 기준도 하나요. 가정을 중심삼은 심정도 하나입니다. 물론 개인과 가정은 둘이지만 이 둘이 합해서 설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남자 여자 가운데에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둘이 있을 수 있어요?

이 심정의 가는 길이라는 것은…. 이렇게 가겠어요. 직선으로 가겠어요? 꼬불꼬불한 길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건 틀림없이 직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가는 길이, 부처끼리의 정, 플러스적 남자의 정 마이너스적 여자의 정, 이것이 플러스돼 가지고, 묶어져 가지고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가정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절대적인 기쁨을 찾아 나가야 할 운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절대적인 행복, 절대적인 희망, 절대적인 이상형을 찾아 나가지요? (이하 판서하시면서 설명하심) 절대적인 그 어떠한 목적의 세계를 요것과 연결시킬 수 있는 출발점이 있다면 마음대로 해서 되겠어요? 절대적으로 요것과 요 심정과 이것의 방향이, 다시 말해 여기서 가자는 방향과 이 방향이 상치(相馳) 안 되고 연결될 수 있는, 과정은 아무리 길더라도 변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길이 있어야 절대적인 주체의 목적자 연결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로 갈 수 있는 심정적 기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가정을 중심삼은 부부도 그렇지만, 가정을 중심삼고 식구들이 있다 할때, 그 식구들이 가야 할 심정적 기준, 부부와 묶어진 기준과 차원 높은 자리에서 가정이 갈 수 있는 길이 되는 정서적인 기준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이상적인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어야 될 거라구요.

한 동리면 동리, 동네끼리 사랑한다. 동네가 하나되자, 동네가 좋게 되자 할 때 좋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남북이 좋게 되기 위해서는 둘 되어야 돼요? 하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데는 무엇이 기준이 되어 가지고 하나되어야 하느냐? 하나되는 데 있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아래 위가 거꾸로 돼도 괜찮다. 그게 아니라구요. 하나되는 데는 기준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표준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표준이 뭐냐? 주체가 되든가 대상이 되든가, 그것이 표준을 결정하지 않고는 하나될 수 있는 길은 나오지 않습니다. 서로가 표준 되겠다고 하면 싸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플러스와 플러스가 서로 플러스 되겠다면, 그것들은 둘이 반발해요. 하나돼요? 반발하기 마련이라는 거예요. 이건 밤이나 낮이나, 자면서도 반발하는 것입니다. 원수끼리는 자면서도 싸우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극단적인 원수면 원수일수록, 자면서도 싸우고, 밥먹으면서도 싸우고, 안 될 말이지만 변소간에 가 앉아 가지고도 싸웁니다. 언제나 24시간 싸웁니다. 24시간 싸우니 일년 열두 달 싸우는 거예요. 일년 열두 달 싸우면 일생 동안 싸우기 마련입니다. 일생 동안 이런 싸움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합니다. 일생 동안 행복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것입니다. 자, 그래요. 그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 갚겠다는 사람은 모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걸 보게 되면, 예수 같은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야! 이거 보게 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구요. 일생 동안 반발하고 일생 동안 서로가 싸우는 사람이 얼마나 불행해요?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보다도 다른 것 다 집어 제치고, 행여나 하늘이 원수를 갚아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바란다 하게 되면 그 얼마나 편안하겠어요? 거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보라구요. 자기가 원수를 갚겠다고 그저 밤낮 없이 해댔자 언제나 상충적인 입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얼마나 불행하냐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원수를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그분이 갚아 주는 것이다. 그분이 원수를 갚아주는 날에는, 원수라는 것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자기가 원수를 갚고 나면, 그 원수의 자식이 있다면, 그 원수의 자식은 내 자식대에서 또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이런 무엇이 있지마는, 그걸 다 집어 던지고 절대자의 공의의 판정만이 있어 가지고 그 판정만이 내 원수를 틀림없이 갚아 주는데, 원수의 자식도 꼼짝달싹 못하고 순응할 수 있는 그런 원수 갚음이 있다 할 때는, 그거 얼마나 멋지냐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원수 갚겠다는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보다도, 다 잊어 버리고 또 다른 희망을 바라서 원수보다도 잘되어 가지고 개인적인 원수를 갚는 것보다도 원수 족속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벌하겠어요? 갚기는 갚는데 길이 두 길입니다. 직접 내가 피해를 받았으니 내가 창으로 가슴을 찔러 가지고 그 피해를 복수하여 탕감 하는 게 아니라, 그럴 게 뭐 있느냐고 하며 내가 노력해 가지고 김씨면 김씨 족속 몽땅 한꺼번에 갚아 버려야 되겠다. 김씨 문중 전체를 그 조상서부터 후손까지 전부 내가 굴복시켜야 되겠다 하면 거 얼마나 멋져요? 그러려면 그 나라의 대통령이 되든가, 그 나라의 왕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원수를 갚는데, 그런 권력자가 되어 가지고 모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야 이녀석들아, 내 원수이지만 다 용서해 주마, 내 말 들어라' 할 때는, '예, 그리고 말굽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 나라를 전부 다 한번 천국을 만드는 것인데, 너희들이 선두에 서서 피땀 흘리고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이것 해 주겠나? 하면, 예이' 하게 돼 있다구요. 안 그래요? 원수를 피로써 갚는 것보다도 원수가 자진해서 하게 해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그 나라와 그 세계를 건설하는 데 돈 안주고 역군으로 쓸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를 갚는 것하고 원수를 안 갚고 나라에 플러스될 수 있게 하는 것과 어느 것이 선한 것이냐 할 때, 원수를 갚아서, 피를 보고 좋아 하는 것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자리에서 그들이 지배하는 사람의 은덕을 고맙게 생각하여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노력하게 만드는 것하고 어느 것이 멋지게 원수를 갚는 것이냐 이거예요. 그런 길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 같은 양반은 그런 방법을 썼다는 거예요. 플러스와 플러스가 남아지는 한 원수는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서로가 주도권을 쥐겠다는 거예요. 요전에 조총련에서 한덕수하고 김병식이하고 헤게모니(he- gemony)쟁탈전을 하는 게 신문에 나고 그랬잖아요? 한 단체에서 두 플러스가 나왔다 할 때는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싸우게 되면 절반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갈라지게 되면 점점 약화되는 것입니다. 약화되는 것은 뭐냐? 어는 것이 아니라 녹는 거라구요. 그러면 약화되는 거예요. 이것은 망하기 마련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