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집: 상봉의 기회 1971년 06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06 Search Speeches

섭리의 방향을 알고 정성을 "- 나가야 주류와 하나 될 수 있어

이런 관점에서 복귀섭리를 추진시켜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에, 하나님은 인간이 알든지 모르든지 역사를 어떤 주류의 방향에 일치시켜 나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종교인들은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지류의 사명을 대행하면서 하나의 주류의 권으로 들어가는 어귀를 향하여 흘러가는 그런 입장을 지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떠한 종교가 있으면 그 종교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지류가 어떤 방향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가는 종교인은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고 있다. 본래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이렇게 동으로 조금 기울여서 가는 것이다. 그러니 동쪽으로 가서 되돌아가야 된다' 하는 이런 입장에 있는 것을 모르고, 가는 길을 통 모르고 곧장 간다고 생각하면 방향이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가는 길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한 방향으로 하나의 형태로 규합해서 하나의 세계를 향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권내로 이끌어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들이 그 방향을 모른다면, 다시 말하면 남으로 가야 되는데 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 방향을 누가 돌릴 것이냐? 이것을 모르고 가는 개인과 종족을 그냥 내버려두면 가다가 파탄되고 말 것입니다. 막혀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되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정성들여 했던 일을 그만두고 되돌아와 가지고 다시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정성을 들여 했는데 안 되었다면 또 정성들여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을 거예요. 이러한 환경에서 사탄은 늘 인류가 정성들이며 가는 길을 어떻게 하든 뚝뚝 잘라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성들였던 사람이 돌아서 와 가지고 다시 정성들여야 되겠다고 할 때에 처음보다 더 정성을 들이면 모르지만 그만한 정성으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이하의 정성을 들여 가지고 출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곁길로 갔다가는 열 번이면 열 번 다 돌아서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백만큼 정성들였던 것이 전부다 깨져 나갔다, 혹은 안 됐다, 틀렸다 하게 되면 또 백만큼 정성을 들여서 죄겠어요?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출발을 하려면 백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백 이하의 정성을 들여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백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는 줄 알면 백 이상의 정성을 들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정성을 들이려면 그 이상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 입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정성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 과정에 왔다 갔던 선조들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역사과정에서 그 시대를 대표해서 어느 선조를 세워 가지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상봉시켜서 지긋지긋한 회생을 치르게 해 가지고 그 목적을 중심삼고 나가게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뜻을 중심삼고 나가다가 틀어지게 되면 하나님은 그 공을 봐서라도 그를 다시 들어 써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왜 그를 다시 들어 쓰시지 않았느냐? 이런 문제가 여기에 귀결됩니다. 과거에 백만큼 정성들인 사람이 실패하여 뜻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자리에 서 가지고는 백 이상의 정성을 들일 수 있는 기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그 이상의 자극을 받아 가지고 새로운 결심의 내용을 반영시킨 사람이 되기 전에는 반드시 그 길에 다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성들여 가는 길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정성들이는 것으로 끝내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저 먼 세계를 향하여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소망하는 곳이 멀면 멀수록 불행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행복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소망하는 곳이 멀면 멀수록, 고빗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 단계 한단계 넘어가기가 지루하지만 정성을 들여서 가야 됩니다. 정성을 들였는데도 안 되면 거기에서 쓰러져 망할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시대가 지나면 가정적인 시대를 열어 놓으십니다. 개인적인 시대에 있어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상봉의 때를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가정적인 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적 시대에 가서는 개인적 시대보다 더 정성들여야 됩니다. 가정적 시대에서 그 때를 맞지 못했다 하더라도 종족적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알고 그러한 소원을 갖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일대에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더라도 그런 사실이 틀림없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후손에게 '너는 이렇게 가야 된다' 하는 유언이라도 남겨서 바톤을 넘겨 줘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가고 있는 길과, 인류들이 가고 있는 길과, 불신자들이 가고 있는 개개인의 길은 전부 다릅니다. 그러니 하나의 역사적인 주류의 형태를 따라가야 됩니다. 그 주류를 따라 가는 데는 과거로부터, 높은 데로부터,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그 주류를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기원에서부터 흘러 나온 역사적인 모든 사연을 묶어 가지고 미래의 세계적 소원의 때까지 연결시켜 주는 주류의 형태가 섭리도상에, 혹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역사의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상봉하려니 주류는 역사시대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일치점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