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집: 식구란 어떠한 것인가 1965년 12월 2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7 Search Speeches

겟세마네 동산-서 하나님의 슬""을 부-안고 우신 예수님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넘어 로마로 가는 길을 똑똑히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만일 유대교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 된다면 로마는 내 손으로 넘어온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400년 걸려서 로마를 정복했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로마가 문제였겠어요? 이스라엘을 기반으로 하여 로마를 정복하실 수 있었던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리이기에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0세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로마의 압정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앞날의 소망이 다 막혀 버리고 황혼길로 접어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민족에 대한 사랑에 불타 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을 걸어 놓고 민족에 대한 사랑에 울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호소 하셨던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일이 가면 갈수록 점점 조급한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움직여야 된다는 신앙을 가진 예수님은 유대교를 밟고 올라서고 더 나아가서는 로마까지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 그리고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로마를 일시에 쳐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시고 준비하셨던 이스라엘이 가정과 민족과 교단이 하나 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맺힌 원한이 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설 수 있는 터전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언덕이 없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유대교는 누구를 기다리고 찾아야 하느뇨?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이 희생의 제물로 죽음의 길을 가면서 닦아온 그 터전은 이스라엘을 행복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한 민족이 메시아인 자신을 몰라보니 그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외롭고 분하셨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초조함을 느끼는 반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여안고 효성의 도리를 다 하려했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 삼면사방 어느 곳에도 그를 붙들어 주는 사람은 없고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슬픔이 되는 것들 뿐이었으니, 그 슬픔을 부여안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예수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까우셨겠는가 ! 또한 유대 민족 앞에 몰리는 예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가슴은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 !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책임지고 가야 할 최후의 운명의 길이 다가온 것을 생각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39)"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때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의 이슬로 희생당하는 것이 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이스라엘 선민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하셨던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고생길, 고난의 길을 밟아오면서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위해 울면서 피맺힌 길을 걸어 나오셨던 그 과정이 이제 자기가 죽으면 전부 산산이 깨져 나가게 될 것을 아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수고하신 역사적인 서러운 사정을 부여잡고 우셨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역적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은 죽는 순간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며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