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집: 우리의 책임 1972년 06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14 Search Speeches

뜻을 대해 누구보다도 심각했던 예수님의 내적 심정

자, 그런데 우리는 그때의 그런 자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그 이상의 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 내적 심정이 해원성사될 수 있겠느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자유스러운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자진하여 그 이상의 자리를 찾아 나가려는 기간이라도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나는 이렇게 가기를 원한다, 나는 이 표준을 넘기 위한 이런 소원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예수가 남겼던 내적인 슬픔의 심정을 해원성사해 드릴 수 있는 외적 환경, 그 이상의 자리가 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내적인 마음으로 그리는 추모의 심정에 있어서 혹은 사모의 심정, 흠모의 심정에 있어서는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도 찾아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문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 시대에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화가 있을 것을 예고하던 예수의 심정, 배반해 나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바라보면서 슬퍼했던 예수의 그 심정을 여러분들도 같은 처지의 자리, 같은 입장에서 느껴야 할 것입니다. 혹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서 핍박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서러운 입장을 그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저 원수들을 몰아내야 할 개척자 혹은 선각자의 입장에서, 애국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 시선은 또한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하는 것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 밤이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밤을 새우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면 아침, 점심 때를 잊어버리고 그 저녁을 당장 끌어다가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앞설 것이 아니냐? 뜻을 대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뜻에 위배되는 마음에 대해서는 촌시라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때가 오면 깨끗이 정리 정비하겠다고, 역사에 악의 흔적을 뿌리도 남지 않게 제거하겠다고 얼마나 내적으로 다짐했을 것이냐? 가중되는 핍박의 길, 어지러운 환경을 대하는 예수의 3년 공생애는 그렇게 내적으로 다짐하며 사무치는 아픔의 심정을 품고 지내던 때가 아니었을 것이냐? 그 심정을 몽땅 토로하며 인자가 바라는 때는 왔다고, 또 이제 당신이 슬퍼할 수 있는 내정적 사연을 전부 제거시켜 버렸다고, 또 이날이 당신이 원하는 날이요, 이때가 바로 제가 바라던 때라고 자랑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얼마나 내적으로 다짐했겠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될 때, 그것은 여러분들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그 마음에 있어서 당신의 소원, 그가 짊어진 책임적인 분야를 촌시라도 밀쳐 버리고 잊어버린 때가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혹, 그리운 사람이 인사를 하게 되면, 그리운 자리에서, 반겨 주는 자리에서 인사를 받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그리워하고 반겨 주는 이 자리가 한날을 차지하고 뜻을 이룬 자리에서 반겨 주고 그리워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쁨이 있으면 모든 조건을 걸고서라도 전부 다밝혀 놓고 싶은 마음을 내적으로 다짐해 가며 나왔던 생활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은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을 이어받을 수 있는 그 누가 없거든 나에게 남아지더라도, 소망의 그 나라에는 이 슬픔을 남겨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는 생활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적인 철학을, 생활적인 주체사상을 갖고 나가는 예수였기 때문에 자기 일신은 십자가에 달려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자기는 망하더라도 당신이 소원하는 나라에는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겠다는 입장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하나의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두절된 환경에서 바라보게 될 때, 소원하던 나라를 돌아서서 찾을 수 있는 길도 없거니와 앞으로 나가더라도 찾을 수 있는 길도 없기 때문에 원수를 대해서 소원의 나라를 다시 심어 놓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그 소망의 나라는 남겨야겠다'는 일념만은 간절했기 때문에, 그 원수의 배후를 통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 예수는 거기에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쓰라림은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 외에는 모를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