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집: 애승일 1987년 01월 02일, 미국 세계선교본부 Page #74 Search Speeches

국가적 승리의 기반을 세계적 승리의 기반으로 -결시킨 1970년대

반대를 받던 통일교인들이 결국은, '한국에 있어서 저와 같은 사람들이 되지 않고는 이북 공산당을 때려 잡을 수 없고, 한국이 새로운 나라를 이룰 수 없으며, 애국하는 단체는 통일교회 밖에 없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1968년에, 어제 지났지만 하나님의 날을 지냈을 때는 이미 사회환경이 변화가 되었고, 통일교회를 어떤 기관이라든가, 어떤 단체들이 합해 가지고 빼 버릴 수 없게끔 공고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동원하던 때가 몇년도이던가? 1970년이지요. 이런 승리를 기반으로 1970년에 들어서면서 전체 가정을 동원해 가지고 거국적인 애국운동을 한 것입니다. 가정 전체가 회생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사상과 같은 사상을 중심삼고 가정까지 전부 다 동원해 가지고 나라를 살리고 공산당을 막아내는 활동을 한 것입니다. 거국적인 활동을 3년 동안 하는 거예요. 가정적으로 3년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3년노정에는 가정이고 뭣이고 전부 다 때려치우는 것입니다. 아이를 고아원에 집어넣든, 뭐 어떻게 하든 가정은 전체가 완전히 동원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들이 얼마나 반대를 했겠어요. 레버런 문이 축복을 해줬으니 살려고 했는데, 생활기반을 닦으려고 했는데 나라를 구하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한다고 해 가지고 전부 깨뜨려 버린다고 하면서…. 그거 뭐 얼마나 평이 많았겠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나라를 수습하고 애국운동을 해서 이 나라를 결속시켜 가지고 하나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통일교회와 하나되는 운동을 하자,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부모들이 반대하니 그런 부모 앞에 애기들을 둬둘 수도 없고, 고아원에도 둘 수도 없고…. 할 수 없으니 자기 고향집에 데려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일화가 많았어요. 포대기에 싼 애기를 집안 뜰에다 넣어 놓고는 도망가다시피 하는 놀음을 하면서 우리는 활동을 시작했다구요. 조금 큰 아이들이 '엄마, 나 버리고 가지 마' 하면 '이 녀석아, 아버지 뜻을 위해야지 네 뜻대로 내가 있을 수 없다' 하면서 우는 아이를 차 버리고 돌아선, 그런 일화가 참 많았어요. 그래야 앞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산다는 거예요. 그래야 살 길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축복 가정들을 동원하기 전까지는 통일교회 식구들은 전부 개인적인 제물이었습니다. 전체 통일교회 교인들은 산, 생축의 제물입니다. 제물적인 생활을 한 거라구요. 전부가 동원해서 전부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777쌍 축복 이후니까 1970년도 이전까지 모든 통일교회 사람들의 생활은 정착생활이 아니라 집시생활이었습니다. 선생님도 생일을 맞이하려면 3년간 생일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생일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거예요. 탕감복귀가 그렇다구요.

그렇게 해서 전부 다 복귀하는 거예요. 노동자에서부터 출발하는 거라구요. 노동자에서부터 복귀해 올라가는 거예요.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서 그것을 잃어버렸으니 별수없다구요. 최하에 들어가서 다시 추어 올라와야 되는 것입니다. 옷을 입을 때, 이렇게 정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장을. 노동자가 정장을 하나요? 설교할 때 양복을 입고서 설교한 게 아마 1970년이 넘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때는 양복도 안 입었다구요. 노동복을 입고 설교한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 식구들은 그런거 처음 알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식탁에 앉아 가지고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 아니예요. 주먹밥에서부터…. 복귀예요. 탕감복귀입니다. 무슨 스푼이니 포크니 그런거 필요 없다구요. 그런거 다 탕감복귀해야 돼요. 그러면서 1970년도에 들어가서 3년 동안 가정들이 전부 다 제물이 되는 입장에 선 거예요. 가정이 제물이 됐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그건 나라를 위해서 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계를 위해서 가정들이 제물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부터입니다.

1970년도를 중심삼고 그렇게 해서 기반을 닦음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이 국가적 기준에 서는 거예요. 3년을 지나고 나니까 풍토가 바뀐 거예요. '통일교회는 그야말로 애국단체고, 통일교인과 같이 되지 않고는 우리나라가 살 수 없다' 하는 여론이 전국화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국민보다는 우리가 더 희생했고, 기성교회보다 우리가 더 희생했습니다. 그러니 더 희생하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희생하는 자들이 축복을 받고 전통의 길을 차지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편안하려는 사람들, 자기만 좋게 살겠다고 이러는 사람들은 전부 낙후되는 것입니다.

1970년에 들어와서 그 일이 끝나기 전, 1972년도 이전에는 이미 통일교회는 애국하는 단체로서 나라나 국민이 전부 다 속으로 '통일교회 같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일반화되어서 상식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3년 이내에 국가적 탕감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반대하는 기독교와 싸워서 기독교 이상의 국가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그 기반을 중심삼고 선생님은 해외로, 세계무대로 진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을 연결한 것입니다. 탕감복귀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지를 미리 택정하고 세계적 운세를 몰아들일 수 있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축복가정 777가정을 중심삼고 세계 10개국 이상의 축복국가를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선생님은 한국에서 승리적 터전 위에 섰지만 미국과 기독교문화권이 반대하고 뜻을 세우지 못한 것을 재차 세우는 놀음을 해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걸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어서 대회를 시작한 것이 몇년부터인가? 1972년부터인가? 1972년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에서의 국가적 승리의 기반을 세계의 중심국가인 미국에 연결시키는 놀음입니다.

거기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미국 조야나 교계로부터 선생님이 환영을 받은 것입니다. 1972, 73, 74년까지, 3년노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환영을 받았어요. 그때 프로클러메이션 (proclamation;성명서) 을 천 장이 넘도록 많이 받았습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기독교가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