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집: 통일교회의 자랑 1990년 12월 27일, 한국 국제연수원 Page #317 Search Speeches

천정과 인정의 결합점

인간의 모든 삶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사랑 붙들고 살지요? 어머니 아버지도 사랑 붙들고 살지요? 또 부처끼리도 사랑 붙들고 살지요? 앞으로 아들딸도 그것을 붙들고 살게 돼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전부 다 사랑 붙들고 사는데, 그 사랑이 무엇을 통해서 연결되느냐? 남자의 것, 여자의 것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정은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 이런 것은 인간세계의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이것을 역사 이래 비로소 문총재라는 사람이 나와서 천정과 인정의 결합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밝혀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낳을 수 있는 완성의 기반을 찾지 않고는 개인완성의 출처를 찾을 수 없어요. 근본 출발점이 완성된 그 기준을 파악하지 않고는 아무리 과정 결과의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완성될 수 없습니다.

인간 완성의 출발점이 어디냐?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제일 귀하고, 인간에게도 제일 귀하고, 이 우주의 모든 존속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 당시 모든 요인의 근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때문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 사랑이 무슨 사랑이냐? 참된 사랑입니다. 그 참된 사랑은 눈이나 입이나 오관이 떠날 수 없어요. 그것을 중심삼고 돌게 돼 있고, 그것을 따라서 왕래하고, 올라가도 그것을 따라서 올라가고, 내려와도 그것을 따라 내려오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오관을 한 초점에 결착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힘이 뭐냐?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타락한 인간세계에서도 사춘기에 첫사랑의 상대를 느끼게 될 때는 눈이나 코나 입이나 귀나 모든 촉감 전체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인간이 외적 인간만이 아니예요.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영인체를 말합니다. 내적 오관이 있어요. 영육을 중심삼은 전체 오관이 일치돼 가지고 폭발할 수 있는 하나의 초점에 가 가지고 맞추게 되면 그것이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는 것입니다. 안팎이 하나되고, 상하가 하나되고, 전후가 하나되는 거예요. 사랑은 그렇잖아요? 이런 등등을 볼 때 우리 통일교회의 자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계시기 시작했느냐? 오늘날 기성교회에서는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 신학은 투쟁의 신학을 낳아 버렸어요. 힘의 천리를 폄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많은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계시기를, 하나님 자신이 그 마음 가운데 혼자 계시는 것도 사랑을 중심삼고 계시는 것입니다. 몸 마음이 하나되어 가지고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영원히 좋아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문총재도 사랑이 있지요? 사랑이 있어도 혼자는 몰라요. 몸 마음을 통해서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혼자서는 그 자극을 느낄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은은한 사랑, 상충적인 화합의 경지에 스스로의 의식과 스스로의 관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으되, 사랑의 길을 추구하는 생각은 할 수 있으되 사랑의 자극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정분합(正分合)이라는 논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외적으로 상대를 세워 가지고 완전히 투입했다가 상대를 떼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영(0)은, 자체를 투입함으로 말미암아 상대편 끝까지 가게 되면, 그것이 미는 데 있어서 수직이 아닙니다. 직선적 작용이 아니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반드시 원형적 작용을 하기 때문에 3점 논리를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직선은 양 점을 연결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 직선세계에는 조화가 없어요. 모든 세계의 존재물들이 3점 이상, 4점을 중심삼고 회전할 수 있는 데부터 천지조화가 벌어지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3점 기반을 누가 만드느냐? 여자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의 상대는 3점에서부터 관계를 못 합니다. 4점으로부터, 4각을 통해서 원형을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 남자 여자만 가지고는 안 돼요. 남자 여자는 그냥 두 존재입니다. 남자 여자만 연결시켜 가지고는 사랑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를 종합해 가지고 중심에 서서 움직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남자 여자가 화합해 가지고 사랑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성성상에서부터인 것입니다. 남성 성품과 여성 성품이 화합하던 그것을 상대적으로 전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자기 아들딸과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어디서 왔어요?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그 사랑의 상대 될 수 있는 존재가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기 때문에 백 퍼센트 이상 상대에게 투입했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을 하게 되면 백 퍼센트 이상 되는 세계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힘의 세계의 논리로 보게 된다면 입력이 출력보다 크지만, 사랑의 세계에서는 입력보다 출력이 몇백 배 더 크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참사랑이라는 것은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서 자꾸 투입하다 보니 우주가 꽉찼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돌다 보니 핵의 자리에 가서 머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핵이 우주 가운데 정착하는데, 동서남북을 중심삼고 전후 좌우를 중심삼고 머무는 것이 제멋대로 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방수를 갖춘 본연적 기준에 일치돼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인정과 천정이 어떻게 합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합덕하게 되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전기에서도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갖다 대면 폭발돼 가지고 그 선이 전부 다 녹아 붙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참사랑에 의한 폭발력은 우주를 전부 비추고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 영적인 영인체와 육신이 하나된 남자 여자가 있어서 하나님까지 달라붙을 수 있는 이런 힘의 본체가 돼 있어서 정착돼 가지고 거기에서 근원적 아들딸이 나왔다면 오늘날 이런 요사스런 세계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밤나무를 보면 밤의 종자가 갈라지나? 종의 구별은 엄격해요. 사랑하는 대상권 내에 제3자를 유도하는 어떤 동물이나 곤충이 있어요? 여러분의 결혼 상대 앞에 제3자를 불러들여요? 여자가 있는데 또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여자와 여자는 반발하지요? 또 남자가 있는데 미남자가 오면 반발하지요? 우주는 서로 보호할 수 있게끔 되어 있는 거예요.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전부 다 그런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우주는 남자면 남자에 있어서 절대적 완성, 여자면 여자에 있어서 절대적 완성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완성길을 가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물건들은 우주를 대신해서 서로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에 있어서 제3의 대상권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종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슴들도 일년에 한 번씩 수놈끼리 뿔로 격투해 가지고 상대를 택한 다음에 따라가게 될 때는 절대복종이예요. 일년에 한 번씩 그런 놀음을 하는데 그것은 우수한 종자를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중심삼은 종자를 남기려고 하느냐? 몸뚱이, 육체가 아닙니다. 사랑에 있어서 우수한 종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만물을 대표하는 인류인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권위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사랑에 있어 우수한 족속을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따라올 수 있고, 하나님이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창조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도 혼자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담 해와가 이루었다 할 때는 하나님이 아담 해와 앞에 경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상대적 존재와 목적적인 가치를 전부 다 첨부하게 될 때는 하나님도 거기에 머리숙인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적인 가치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느냐?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앞에는, 사랑의 완성체 앞에는 하나님도 머리숙여야 된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