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집: 뜻을 품은 예수 1970년 12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31 Search Speeches

뜻을 무서워하신 예수님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규합해 가지고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의 터전을 마련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투쟁의 대열을 지어 길을 출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기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상충되고 고립된 입장에 선 예수님의 외로운 심정을 그 누가 알아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힘을 하나님에게서 밖에 보강받을 수 없었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 면목없는 자신이요, 세상에 대해서는 책임을 못한 자신인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슬픈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생활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아침을 맞을 적마다, 어제는 외로운 입장이었지만 오늘은 새로운 일이 벌어져서 내가 가야 할 길의 동조자가 되고 내가 개척해야 할 행로에서 시범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바랐지만 예수님의 막막한 사정을 모르는 철부지한 제자들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사막이나 어디거나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했고, 목이 마르면 목이 마르다고 투정을 했으며, 옷이 남루하면 옷이 남루하다고 투정을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3년동안 그러한 투정을 얼마나 많이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예수님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왕자로 이 땅위에 왔던 예수님을 그렇게도 고독하게 해서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로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뜻을 품은 예수였기 때문에 뜻 때문에 외로와 했고, 뜻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뜻 때문에 죽음길도 각오했던 것입니다. 뜻 때문에 부모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뜻 때문에 형제를 원수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까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딱한 사정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의붓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의 소원과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에게 '아 형님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왜 올라가지 않습니까?'하고 빈정댔습니다. 이와 같이 동생들까지도 예수님 앞에 빈정거렸다는 것은 요셉 가정에 있어서 요셉이 책임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요, 마리아가 책임을 못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부모를 배신하고 원수의 입장에 서서 반항의 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고독한 예수님이고, 유대교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를 지도하는 교법사들을 대하여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고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입장에서 그런 입장으로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뜻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뜻을 안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그 뜻길을 따라가야 할 예수님의 행로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주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해줘야 할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한 예루살렘에 대하여, 그 나라의 모든 교권과 주권의 중심지인 그 도시를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하늘까지 이르고 싶으냐, 음부에 떨어질까봐 조심하라'고 저주의 발언은 해야만 했던 예수님의 딱하고 처량한 사정을 그 누가 알았습니까? 이는 죽기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요,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품은 뜻을 누가 알았으며, 그러면 예수님의 사연을 그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느냐? 뜻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면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었더라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는 자리, 친척들에게 바알세불 신이 씌웠다며 몰림을 받는 곤욕스런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