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집: 뜻 앞에 설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 1965년 01월 1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93 Search Speeches

복귀섭리의 공식

복귀노정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 이렇게 7단계 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7단계지요? (판서하심) 하나님이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경륜해 나오시는데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이 불변의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뜻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뜻 앞에 개인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요 높이(가정)에 해당하는 심정이 요구되었습니다. 가정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개인이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 즉 죽지 않을 만큼의 시련을 가한 후에야 비로소 가정으로의 출발을 시켰던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하시되 반드시 환경에 부딪치게 하여 거기에서 승리해야 축복을 해주십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위로는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옆으로는 환경의 책임을 짊어지고 뒤넘이쳤던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아브라함은 여기(가정)에 해당하는 뜻을 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은 뜻과 언제든지 일치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 이었습니다. 또한 뜻을 중심한 개인과 가정의 터전을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아브라함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대한 아브라함은 개인의 시련을 받는 동시에 가정의 시련까지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개인적으로 승리한 뒤에는 가정적으로 출발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한 개인이 출발할 때 가정적인 시련까지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개인적인 시련은 물론이요, 가정적인 시련까지 받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정을 중심삼고 설 수 있는 환경적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선 반드시 개인을 터로 한 가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뜻을 품고 생활을 하되 가정과 뜻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엔 역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행동이란 방향 제시입니다. 환경이 어지러워 뜻앞에 설 수 없을 땐 그 환경을 정비해야 했습니다. 원수가 덤빌 땐 또 그에 대처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환경 속에서 뜻을 품고 생활무대에서 개척자로서의 행동을 했습니다. 또 그는 세계사적인 대표자로서의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3개 민족으로부터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거기에서 굴복당하고 쓰러졌다면 뜻을 세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뜻을 위하다 간 수많은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을 볼 때, 하나님 앞에 영원한 승리자로 결정될 수 있는 최후의 책임과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뜻입니다, 뜻. 영원불변한 뜻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더라도 이 뜻만은 남아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 뜻을 빛낼 수 있는 생활과 행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에 이 뜻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개인을 불러 세워 선민의 발판을 닦아 나오셨습니다. 그것이 야곱 때의 역사입니다. 야곱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을 갖춘 다음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란 땅에 들어가 민족의 발판을 닦으면서 가정적인 축복의 터전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언제나 한 단계 앞당겨서 준비했던 것입니다. 만일 준비없이 축복을 받았다가는 대번에 깨져 나가게 됩니다.

축복의 기준을 세우는 데는 개인이면 개인으로서의 시련이 있고, 가정 이면 가정으로서의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종족이면 종족으로서의 시련이 있고. 민족이면 민족으로서의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정적인 시련을 거쳐야 하고,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는 종족적인 시련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도 종족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시련을 거쳐야 하고, 민족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시련을 거쳐야 하며, 국가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계적인 시련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공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