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집: 우리의 갈 길 1986년 01월 24일, 한국 한남동공관 Page #258 Search Speeches

예수님이 결혼을 못 하신 이유를 알아야

신랑 되신 주님은 다시 와 가지고 신부를 찾아서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본연의 사랑을 중심한 부부의 기준을 만들어 놓으면 자녀의 기준은 자동적으로 나오는데, 그 기반은 국가의 기반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국가의 기준을 초월하지 못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가정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탄권 내에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내가 세계기준이라면 개인기준으로부터 가정기준, 종족기준, 민족기준, 국가기준, 세계기준으로 판도가 되어 있는 거예요. 가정기준을 이루면 국가기준 안에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예수가 바란 것이 뭐냐? 예수가 원한 것이 뭐냐? 신랑으로 와 가지고 직접 결혼했으면 될 것 아니냐 이거예요. 왜 서른 세살이 되도록….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서른 세살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사내는 예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 서른 세살까지 장가를 못 갔어요?

성경을 보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집에 가서 예수 어머니가 예수님께 '야, 예수야! 잔치에 쓸 포도주가 떨어졌다' 할 때 예수님은 어머니 대해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했습니다. 그 말은 친척집에 와서 남의 결혼은 축하해 주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결혼시켜 줄 것은 왜 생각지 않느냐고 반박한 말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어야 반박했다고 말할 때 '그거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라고 이해되지 그냥 '그랬을 것이다' 하면 되겠어요? 말로는 '뭐 유대 역사는 그런 것도 있다' 하면서 별의별 수작들을 다 한다구요. 정당화시켜서 자기 나름의 이론을 펴 가지고 수작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보라구요. 예수님이 열두 살 때 부모와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그냥 놔 두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흘쯤 있다가 예수가 없는 것을 알고 도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간 거예요. 찾아 가지고 '너 왜 여기 있느냐?' 할 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느냐'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예수님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싸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성경에 없지요? 요셉과 마리아가 싸웠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예수는 사생아예요. 마리아가 사생아를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 원인을 규명할래야 규명할 수 없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말했는데, 꿈가운데 가르쳐 줬다는 말이예요, 꿈에 죽은 아버지가 나타나서 '벌거벗겨 놓고 치면서 이것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역사이니 너는 믿지 않으면 안 된다' 해도 전부 다 모른다 이거예요. 꿈 가운데 '너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 한 거예요. 꿈에는 개 꿈도 있고 별의별 꿈도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거 사된 꿈이라고 하면 그만이고 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인이었던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절대시하고, 자기 생명을 걸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고비를 넘겨 가지고 꿈을 중심삼고 마리아를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된 것입니다. 그걸 보면 요셉은 의인이라구요.

그런데 사지에 있었던 마리아를 살려준 요셉이…. 그때 유대교 법으로 하면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하면 돌에 맞아 죽는 거예요. 개한테 뜯어먹히는 비참한 죽음밖에 없는 거예요. 결국 모든 허물을 감싸 준 요셉인데, 요셉이 마리아에게 '당신 뱃속에 있는 애기 아버지는 누구냐?' 하며 안 물어 봤겠어요? 윤박사, 안 물어 봤겠어? 여기 똑똑한 이박사, 안 물어 봤겠어? (웃음) 안 물어 보았다면 그건 미친 녀석이예요. 틀림없이 궁금해 물어 보는 데 마리아가 대답하기를 '아, 성신으로 잉태했소' 그럴 수 있어요? 이박사, 그거 믿겠소? 여러분, 영통을 하고 영계를 들락날락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은 못 믿는다구요. 나도 영계를 잘 아는 사람이지만 사랑의 세계는 절대적입니다. 제2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믿듯이 '오, 성신으로 잉태했으니 잔소리 말라' 할 때 요셉이 '예이!' 했을 것 같아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싸움이예요. 그래도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를 옹호했다구요.

성경에도 있잖아요? 예수의 동생들이 예수에게 뭐라고 했느냐? '아, 형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나타나기를 바라는데, 장막절이 다가오는 데 왜 안 올라가요? 출세하기를 바라면서 왜 시골에 엎드려 있소?' 하며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 때문에 가정에 풍파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모릅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으면 간단하지요. 그것은 비밀은 다 감추어 놓고, 사회에 욕먹을 수 있는 내용은 전부 다 감추어 놓고 성경을 편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자기들의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있는 내용만 모아 가지고 성경을 만들었지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 비밀을 알 게 뭐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장가를 못 갔느냐 이거예요. 오늘날 미국식으로 하면 하루 저녁에 만나 가지고 얼마든지 자유스럽게 결혼할 수 있는 데 왜 33년 동안 혼자 끙끙거리다가 장가도 못 가 보고 십자가에 죽었느냐 이거예요. 그러다가 돌아간 예수가 훌륭해요? 얼마나 비참해요? 그런 내용을 다 알아야 된다구요.

왜 그런 걸 모르느냐 하면, 하나의 근본원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원칙이 뭐냐 이거예요. 사랑의 이상적인 기대를 타락한 세계에서 복귀 창건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상하는 세계는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이 표준을 중심삼고 끝날까지 나오고, 여기에 희미한 것은 다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독생녀의 인연을 통해 가지고, 참된 신랑 신부를 통해서 독생 손자, 독생 손녀를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그래 봤어요?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삼고 그래 본 역사가 있었느냐 이거예요. 성경역사에는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