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집: 어찌하십니까 1972년 08월 13일, 한국 청평수련소 Page #116 Search Speeches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 서야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다

민족을 희생시키더라도 세계를 남겨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아는 예수에게 자기 민족이 망하더라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남겨 놓아야 되겠다는 절규의 마음이 자기의 죽음보다 강했기 때문에, 죽은 예수는 부활의 역사를 입어 자기가 태어난 이스라엘 나라를 넘어서 가지고 세계가 발전할 수 있는 동기를 가려 놓았을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사명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은 단적으로 통일교회의 문 아무개를 중심삼은, 그러한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새로운 무슨 주의 사상을 중심삼은 운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냐. 창조주이신 하나님, 창세 이후 창조물을 지어 나가는 창조과정에 있어서의 하나님,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소원성취의 일념을 가지고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시며 창조해 나오시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소망의 일념을 가지고 모든 수고의 노정, 창조의 노정도 수고로 생각지 않으시고 소망의 터전으로 생각해 싸워 나오던 전부가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결실되었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아담 해와는 이것을 완전히 파탄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고, 심정을 중심삼고 상처받은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하고 '당신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하던 예수의 심정을 생각해 보세요. 그것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이 둘로 말미암아 천지에 행복의 터전이 벌어지고 그야말로 창조주로서 바라는 이상의 실현이 가능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전체가 파탄되어 가는 것을 직시하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랑하는 자식들을 키워 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식들의 장래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 자식은 틀림없이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오늘보다 영광된 자리가 확보되어 있다. 보증되어 있다. 틀림없이 결정적이다' 해 가지고 나가는데 그 결정적인 코스를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것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면 어떠하겠느냐? 그러한 장면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소원하였던 그 소원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창조이상으로 세웠던 그것이 하나님에게 희망의 요건이요 행복을 초래할 수 있는 자극적인 요인이 아니라, 반대로 탄식의 요인으로 화해 가지고 하나님의 가슴을 향해 쏴 버리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이건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는 그 현장을 직시하던 하나님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어떠하셨겠어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잠깐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도, 어떤 사람에게 슬픈 일이 있게 될 때에, 그의 슬픔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는, 슬픈 그 사람 보다도 더 슬픈 일을 가지고 있든가 더 사랑하든가, 더 높은 자리의 인연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그 슬픈 사연을 완전히 제거시켜 버리고 기뻐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혹은 부부생활에 있어서의 감정 문제를 두고 볼 때도, 그 부부 싸움은 위로해 줄 자가 없습니다. 막을 자가 없다구요. 그 이상의 심정적 내용을 지니지 않고는 간섭할 수 없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부부의 사랑보다도 높은 사랑을 하는,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와서 자식들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논의하게 될 때에는, 그들은 간섭을 받게 되는 거라구요. 슬펐던 일을 넘어 기쁠 수 있는, 더 사랑적인 내용을 가지고, 더 가치적인 내용을 가지고 접근하여 기뻐하라고 하면 위로가 되지만, 그 이하의 것 가지고는 위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의 감정이 아니냐.

이렇게 볼 때에, 타락 직후에 타락한 아담 해와를 직시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 절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담 해와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 아담 해와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할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 아담 해와 이상의 심정적 내연을 갖고 나타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나와 가지고야 역사적으로 상처를 받은, 타락 직후의 아담 해와를 직시하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위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기도할 때에,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거리를 두고 아뢴 것은 무엇이냐? 타락한 아담의 역사, 그 역사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겠다는 결의를 예수가 최후로 표시한 것이 아니냐. 심정적 문제에 있어서 자기를 생각해 가지고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냐. 자기의 환경적 요건 전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냐.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에, 아담보다 낫다는 거예요. 아담보다 낫다는 거예요. 아담보다 나을 수 있는 심정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의 내연을 찾아 나섰던 예수의 모습이 아니냐. 그가 거기서 울면서 농조로 한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눈물과 피땀을 흘리면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쫓겨날 때의 비통함 이상의 비통함을 느끼면서 담판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타락의 역사적 기원을 잊어버릴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하의 가치적인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