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집: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1965년 10월 08일, 일본 노가따학사 Page #180 Search Speeches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선생님은 일본에 와서 좋은 곳에 구경하려 다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후지산(富士山)에도 가지 않았고, 아다미(熱海), 하꼬네, 닛꼬(日光)에도 가지 않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땅에도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고 나서 ‘저기는 좋은 곳이니 가보자’라고 말씀하신 후에야 간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았다. 이것이 선생님의 주의이다.

휴일 같은 때에는 가와사끼(川崎)에 있는 회사 등에 자주 갔어요. 거기에는 유산탱크가 있는데, 노동자가 그 유산탱크 속에 들어가 정화하기 위해 원료를 죽 내려 보낸다. 그리하여 그 장치는 몇년간 쓰게 되면 못 쓰게 되어 버린다. 유산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을 교환하기 위하여 그 탱크 속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속에서는 15분 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런 곳에서 싸우면서 일했다.

돈이 없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이 아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의 형님께 ‘전 재산을 팔어서 돈을 부치라’고 전보를 치면, 형님은 세계 대표적인 가인이어서, 곧 보내 주신다. 그런 사람은 좀처럼 없다. 선생님의 형님은 선생님이 어떤 남자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사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세계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고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열렬한 신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여 전보를 치면 곧 보내 준다.

선생님은 돈이 있으면 전부 친구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런 곳을 돌아다녔다. 잘했지요?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일본을 사랑하는 조건을 세우자’ 그런 것을 생각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커다란 삼목(衫木)을 부둥켜 안고 눈물 흘리며 운 적도 있었다.

한국이 일본 정권하에 있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 들어갔다. 이곳 도오꼬오(東京)에 와 있을 때에도 한 달에 한번은 경찰서에 불려 갔다. 그 경찰서는 다까다노바바(高田馬場) 거리의 와세다대학(早稻展大學) 쪽에서 오른편에 있다.

그때에도 선생님이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면, 한국에 연락이 간다. ‘아무개가 한국에 돌아간다’라고. 학생이었지만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선생님을 잘 모른다. 선생님을 보면, 입은 옷은 헌 옷가게에서 산 싼 것들이다. 그 옷을 보면 반들반들 윤이 난다. (웃음)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는 기분을 내서 포마드라든가 무엇인가를 바른다. 바람이 불거나 태풍이 불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바른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다. 선생님은 어떠한 봄날이나 여름날에도 바르지 않는다. 또 걸을 때에는 밑에서부터 45도 이상 위를 보지 않는다. 이런 일을 했다.

선생님은 이전에, 선생님이 하숙했던 여러 곳이 있었음을 생각하면서 그중 한 하숙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하숙집의 아주머니를 만나고 왔다.

선생님은 눈오는 날이나 태풍이 부는 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하층 노무자들의 밥집에 나가 일을 했다. 그런 때는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태풍이 불고 있던 때니까 거기서 손이 새까맣게 되어도 비에 맞아서 죽 흘러내려 깨끗하게 되어 버린다. 그런 가운데에서 땀을 흘리며 일한다. 그 기분이 참으로 상쾌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나쁜 사람이 있으면 혼내 주었다. 이런 것을 선생님은 잘 생각한다. 때로는 큰 놈을 해치운다. 그리고 노동판에는 조장이 있어서 착취를 하는데, 3할은 떼낸다. 그래서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강력히 항거했다. 선생님은 무서운 자들이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선생님이 ‘에잇’ 하면 ‘악’ 하며 항복한다. 그런 일을 잘 했다.

선생님은 일본인으로부터 많은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고문한 그 특별고등형사(特高刑事)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 친구들을 전부 모아 놓고, ‘불쌍한 것은 패한 일본이다. 이미 주권을 잃어버려 무릎을 꿇고 비는 사람을 때리는 자는 하나님이 벌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한국에서 쫓기고 있는 일본인을 조용히 불러 ‘고문당하기 전에 빨리 돌아가라’고 말하며 짐을 정리해 주기도 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몰랐다. 선생님은 성서를 연구하기도 하고 종교관계 서적이나 보통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철학서를 가지고 와서 읽었다.

와세대학 정경과에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공산주의를 공부하고 있어서 그 친구와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또 노방에서 큰소리로 연설한 적도 있었다. 벚꽃이 만발하여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그곳에서도 했다. 그 시대에 대한 비판을 했다. ‘내일의 청년은 이러이러한 식으로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쳤다. 그때 예언했던 것이 지금 다 맞아 나가고 있다. 그때 친구들이 어정어정 구경 와서는 ‘어떤 젊은이가 저렇게 열렬하게 호소하고 있지, 대체 누구야? ’ 하며 머리를 디밀어 보고는 ‘어이 누구 아니야!’ 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교실에서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선생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동급생들은 학교 선생님보다도 오히려 문선생님을 가장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평소에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선생이 학교 선생님한테 한번 질문을 시작하면 대답할 수 없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한번 일어서서 질문을 시작하면 학교 선생님의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질문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어서면 모두 얼굴이 빨개지는 거예요. 특히 이론이나 변론같은 때는 학교 선생님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친구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국민학교 졸업식 때 답사시간이 있지요. 선생님들에게 답사를 읽게 마련이다. 그때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단상에 올라가 호소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는 경찰서장, 군수, 교장 선생님 등 지방 유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자리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면서, 소년시대의 교육에 대한 비판과 지금까지의 학교 선생님에 대한 비판을 모두 해버렸다. ‘이 선생님은 이런 성질이 있다. 역사 선생님은 이런 성격이고 이러이러한 사고를 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며 선생님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시대적 비판도 하고, 또 ‘이 시대의 책임자는 이러이러한 각오를 지녀야만 합니다’고 한 시간 가까이 했는데, 그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소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때부터 레테르가 붙여졌다. 경찰로부터 지목받게 되었다.

선생님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했다. ‘이 입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있을까,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 라고 숙고한 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서른 살까지는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 언제든지 밥을 가져오면 사발로 서너 그릇을 단번에 먹어 버린다. 그 정도로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고 하게 되었다. 전쟁시대인 그때에는 식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식권이 있어서 ‘몇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먹어 보자’고 친구들을 데리고 갔다. 젊은이들이 모이면 참 재미있어요. 모두들 ‘야, 열 그릇은 문제 없다’‘오늘은 자네 생일이니까 마음껏 먹어라, 내가 한턱 낼께’ 하면 큰 소리를 친다. 다까다노바바를 쭉 내려가면 절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식당이 쭉 늘어 서 있어요. 거기에서 선생님은 닭고기 계란덮밥을 일곱 그릇이나 먹었다. 일곱 그릇 먹고 나서는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배가 고픈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 일도 하곤 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항상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에요. 선생님은 항상 배가 고팠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결코 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배만을 채우고 있으면 자신으로부터 민족이 멀리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자기에게서 멀리 달아나 버린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지만, 그 이상으로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리이며, 선생님의 신조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서른 살까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던 것이다. 형무소로부터 나왔을 때,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계속 먹을 수 있었다. 웬일인지 무엇을 먹고 또 먹어도 배가 불러도 거기에서 과식하여 죽을 정도로 먹고 싶었다. 아무리 채워도 포화상태가 되지 않았다. 그렇듯 언제나 모자랐다. 이렇게 하면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다.

여러분은 일본을 사랑하겠지요? 어느 정도 사랑하세요?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이 사랑할 필요는 없다. 먼저 여러분을 낳아준 부모를 사랑하라! 그 부모의 손이 가늘어지면,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려라! 동생이 다른 사람들같이 좋은 옷을 입지 못하였으면, 그 옷을 붙잡고 눈물을 흘려라! 자기의 부모에 대해서 자기의 형제에 대해서 책임져라! 그것을 하지 못하고 그 마음을 갖지 않는 자가 어떻게 나라를 사랑하겠는가? 그것은 원리적으로 보더라도 맞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기준에서의 부모를 중심으로 한 형제들인 것이다.

심정의 세계는 국경이 없는 것이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경계가 되지 않는다. 선생님은 일본에 오면 한국인이 아니예요. 한국 사람이 아니라 하늘 사람이다. 그러니까 천국인이다.

와세다대학의 다까다노바바의 길을 하루에 두 번씩 걸었다. 잘 걸었어요. 그것을 생각하니 ‘아 가까운 곳에 왔으니까 옛날을 회상하여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기도했던 그 기도의 정이 현재 일본의 일각에 성취된 감사의 기도를 하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면,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으로써 와세다의 도쯔까쪼우(戶塚町)를 다까다노바바로부터 걷기를 바란다. 거기에 있는 굽은 길, 거기에 있는 전신주 등 여러분들이 기억할 수 있는 곳에는 선생님의 눈물이 스며 있다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