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집: 하나님과 나 1967년 04월 1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49 Search Speeches

심정적 일치도 '"하지만 실생활-서 일치하" 것도 '"해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그것을 알았다고 할진대, 선생님이 걸어온 모든 탕감적인 과정을 크게는 못 가더라도 조그맣게라도 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7년노정이라는 것이 나온 거예요, 7년노정. 그 노정에서 뭘하느냐? 선생님이 증거하고, 선생님이 사랑하고, 선생님이 위하던 그 기준을 내 개인으로서 한다 이거예요.

그것을 왜 하느냐? 그런 활동을 할 때 하늘이 상대를 해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런 조건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상대를 해 줘야 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심정의 일치가 벌어지는 겁니다. 어디서 심정일치가 벌어지느냐? 내가 원리를 알고 가는 곳입니다. 반드시 원리를 알았으면 행동적인 면에서 탕감복귀해 나오는 소생·장성·완성 과정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이 체험하느냐? 그 기준과 일치가 될 수 있는 기준을 묶어 놓아야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원리를 알아 가지고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피눈물나는 투쟁과정이라든가, 자기의 환경이 어렵더라도 일부러 그런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정성들일 수 있는 생활적인 과정을 거쳐 가지고, 하늘이 탕감노정에서 역사를 두고 복귀노정을 탕감해 나오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여러분이 원리를 통해서 알아 가지고 심각한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통곡을 해야 된다구요.

아담가정을 말하게 될 때는 아담가정의 아담이 아니예요. 그것은 선생님인 동시에 나입니다. 내가 해와를 두고 보면 해와가 거 무슨 해와가 아니예요.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나예요. 노아면 노아 자신이 노아가 아니요, 노아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이고 여러분이라면 여러분입니다. 그런 과정 이상, 그 이상의 신념적인 과정에서 하늘을 부여안고 사탄의 억센 참소의 조건도 억눌러 가지고 그런 환경을 눌러 나갈 수 있는, 노아 이상으로 심정적으로 하늘을 위하는 기준을 중심삼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것이 노아가 아니예요. 노아가 아니라는 거예요. 또,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제일 어려운 기준에서 몸부림치던 것이 재현되지 않고는 탕감복귀가 안 된다구요. 탕감복귀가 안 된다 이거예요.

모세면 모세를 중심삼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예수면 예수를 중심삼아 가지고도 내적 기준에서 그것을 재현시켜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탄과 일대일의 참소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이것을 해결지을 수 있는 자리에서 탕감적 위치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해요.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로서 여러분과 관계를 어디서 맺느냐 이겁니다. 관계를 어디서 맺느냐? 여러분 자신에서 못 맺어요. 절대 못 맺는다 이겁니다. 지금 탕감복귀가 쉽다는 것은 선생님이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쉽다는 거예요. 그러면 실체를 통해서 이루어 놓은 기준을 따라 여러분이 갈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실체적인 조건이 되었던 모든 것을 재현하여 작지만, 짧지만, 폭이 좁지만 그런 것을 느꼈다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수정체면 수정체와 같은 입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이런 수정체가 있잖아요?

그렇지 않고는 여러분이 뜻 앞에 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가다가 옆길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막연하다 이겁니다. '선생님은 뭐…. 원리적으로 보게 되면 선생님은 뭐야, 뭐?' 그럴 수 있어요. 요즘에 본부 식구들도 그래요. '선생님이 축복가정들에게 축복 다 해주고 선생님도 자리잡았기 때문에 이젠 선생님대로 살고 우린 우리끼리 살자.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나?' 그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요즈음 본부의 오래된 사람들은 '우리는 뭐고 선생님은 뭐야. 우린 고생해야 되고, 선생님은 지금 자리를 잡아 가지고 이렇게 되었는데 우리하고 무슨 관계 있나?' 그런다구요. 그게 안됐다는 거예요. 그러한 사상을 갖고 있으면 그는 탕감노정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일치가 되지 않고는 여러분의 위치라는 것은 막연합니다. 막연하니까 언제든지 자기가 몰리고, 언제든지 그 사람들을 신임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무슨 짓이든지 다 한다 이거예요. 자기가 만약 불리하게 되면 교회의 모든 것을 이용해 먹고 떨어질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하늘을 몰랐다는 겁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선생님이 지금 본부면 본부에 있다고 합시다. 있을 때도 이 본부 식구들이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매일같이 가까이 대하고 있는 본부 식구들이 선생님을 점점 몰라요. 선생님의 내적 생활은 굉장하거든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걸 아나요? 밥 먹고 같이 있지만 그걸 뭐 얘기를 해주나요. 자기들과 뭐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뭘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뜻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것은 모르니까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무관심한 사람들은 완성되더라도, 뜻이 이루어지더라도 하등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관심한 자기 자체들은 망각해 버리고 뜻이 이루어지면 그때 자기는 제일 두드러질 것을 생각한다 이거예요. 그러한 모호한 자리에 서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여러분이…. 선생님도 지금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늘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이냐 하고 매일같이 문답해 나가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 나는 뭘할 것이냐? 지금 이런 입장에서 나에게 이러이러한 사실을 하늘이 명령할 때 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그 이상의 자리가 아니예요? 크면 클수록 그 반대되는 비참한 자리까지도 뜻을 위해서 언제든지 다짐하고 나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책임이 많이 벌어진다고 해도 선생님이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평범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책임에 대한 것은, 지금도 이 책임에 대해서는 모험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르는 모험도 한다는 거예요. 이러지 않고는 안 된다구요.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도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수습하지 않으면 천운이 막혀 버리는 겁니다. 발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은 선생님이 앞에 나가니 앞에 나가는 선생님을 반드시 따라 나와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따라 나오려면 어떻게 따라 나와야 되느냐? 물론 원리를 배워 가지고 심정적인 내정도 통해야 되겠지만, 실제문제에 있어서 생활에 어떻게 접근해 들어가고, 그 심정문제를 중심삼고 일치가 될 수 있는 길을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상할 거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