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집: 제물의 완성 1971년 09월 0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62 Search Speeches

복귀섭리의 발전을 위해 하나님이 택하" 사람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 가정에 있어서 아벨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아벨의 뜻을 이어받는 사람은 아벨보다 못한 사람이겠느냐, 나은 사람이겠느냐 할 때, 두말할 것도 없이 아벨보다는 나은 사람이어야 됩니다. 나은 데 있어서는 일부분만 나아야 되느냐? 아닙니다. 전체적인 분야에서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평면적인 기준을 넘어서 입체적인 기준, 즉 전체적인 분야에서 낫기를 인간은 물론이고 보다 높으신 하나님은 더욱더 원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 아벨을 능가해야 합니다. 또 봉사적인 면에 있어서도 능가해야 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아벨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당연한 일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노아를 중심삼고 뜻이 완결되지 못했고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찾고자 한 선의 목적, 선의 기준을 찾지 못했다 할진대는 다음 사람이 그 뜻을 이어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계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노아보다 못해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였다면, 아브라함은 노아보다 나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노아보다 낫다는 내용을 제시할 수 있는 요건은 무엇이냐 할 때, 노아보다 편안한 자리가 될 것이냐, 노아보다 험난한 자리가 될 것이냐? 노아보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노아보다 나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보다 모든 여건이 어려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극복하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입장에 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아브라함이 그랬느냐? 아브라함이 노아보다 더 어려운 자리에서 수고했느냐? 그랬다면 어떤 환경에서 노아보다 나았느냐?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로서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생활권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어려운 일은 정든 부모, 혹은 고향이라든가 정서적인 면에서 안식의 터전이 될수 있는, 안식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는 생활권을 격파하고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를 하나님께서 요구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즉 자기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불시의 명령을 받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즉시 길을 떠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소망을 두고 내일의 희망을 두고 기다릴 수 있는 자리를 향해서라면 모르지만 그저 당장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정든 고향산천과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 '너는 떠나면 이렇게 되고 이런 결과가 된다'고 확실히 가르쳐 주고 떠나라고 했으면 모르지만, 혹은 '네가 떠나면 현재보다 낫다'는 귀결점을 명시해주고 떠나라고 했으면 모르지만, 그런 내용도 없이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라고 하는 명령에 그냥 떠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또, 그렇게 떠나는 것을 부모들이 반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필시 아브라함은 부모 몰래 떠났을 것입니다. 형제 몰래 떠났을 것입니다. 친척들 몰래 떠났을 것입니다. 몰래 떠나는데 대낮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을 때에 떠났겠습니까? 틀림없이 밤중이나 새벽에 길을 찾아 떠났을 것입니다. 이렇게 목적도 제시되어 있지 않고, 환경의 내용도 분별되지 못한 자리에서 하늘의 명령만 받고 떠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노아는 그래도 120년이라는 한계선을 그어 놓고 명령을 받은 입장에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그러한 내용이라든가 혹은 환경적 여건도 제시받지 못한 자리에서 자신의 일체를 부정하고 떠난다는 것은 어느누구보다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심정적인 분야, 정서적인 분야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어려운 자리를 극복한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게 되면, 그는 영광 중의 영광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미래에 애급의 주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왕자로서 소망이 있다면 어느누구보다도 큰 소망을 가질 수 있고 희망과 야욕이 있다면 어느누구보다 큰 야욕과 큰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행복하다면 어느누구보다 행복한 자리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을 도맡아 가지고 자기 주위의 모든 환경을 부정하고, 자기의 생사 문제까지 넘어서야 하는 그런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모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일신의 영광, 갖추어진 환경의 모든 영광이 문제가 아니요, 자기 생명이 안일한 자리에 있는 것을 자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을 자기 어려움 이상의 어려운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장래에 민족과 이스라엘 나라를 자기보다 영광의 자리에 놓고 싶었던 것이 모세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영광을 생각지 않고 고난과 수난의 역로를 다짐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선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하의 자리로 뛰어내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 자신이 앞날에 어떻게 된다는 하나님의 보장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닙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가지고, 격분하여 행동을 하고 나니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이 거부당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부딪쳤는데도 이스라엘 민족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내심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며, 도리어 원수의 대상으로 나타났던 애급 민족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수난이 있으면 그 수난을 고이 감당하고, 그 수난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미디안 광야에서 갖고, 하나님 앞에 깊이 사례하는 심정의 생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도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런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명령을 받고 그런 자리에 선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보다 나을 수 있는 가치의 내용을 다짐하는 자리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평상시에 느끼는 그런 입장에서는 전진적인 환경을 맞는다고 해도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