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집: 조심히 살펴야 할 신앙의 길 1959년 04월 1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22 Search Speeches

기도

변화산상에서 판가리 싸움을 하던 예수의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었사온데 베드로, 야곱, 요한은 '선생님이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저희가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 하던 제자들의 심정을 저희들이 감히 짐작하겠나이다.

땅 위에서 이념의 흔적도 느끼지 못하고 이념세계의 실정도 알지 못한 무지몽매한 그들, 온 우주를 주관하고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이념적인 환경이 벌어지는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자가 있겠사오리까? 과연 그리던 그 한 장면이요, 살고 싶었던 그 한 장면인 것을 마음으로는 알았으나 현실적인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때의 베드로, 야곱, 요한은 몰랐었사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마음으로 천국을 고대하고 그리워하고 있으나 천국을 찾는 데에 싸움의 행로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망각하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을 각성시켜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사옵니다. 더우기나 끝날인 오늘날에는 역사도 변하고 있고, 신앙도 변하고 있고, 인심도 변하고 있고, 전통도 변하고 있고, 주의도 변하고 있고, 이것 아니면 죽는 다던 사랑의 심정도 변하고 있는 이때, 변하지 않는 이념, 변하지 않는 모습,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자체, 그것, 그 동산, 그 세계, 그 주권, 그 지도자, 그 음성, 그 생활, 그 환경이 그립사옵니다.

아버님, 맺혔던 가슴을 여시옵소서. 이제 오늘의 내 한 자체가 이렇게 초조하고 이렇게 좁은 자신임을 알았사옵고, 오늘의 나를 넘어 내일의 나를 추구하기에 급급할 수 있는 내가 그립사옵니다.

통일신도들이 가는 걸음에 핍박이 있다 하더라도 그 핍박을 내가 가는 길을 막는 악의 요소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나를 하늘의 심정으로 더 가까이 몰아내주는 자극적인 작용으로서 이용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핍박은 핍박이 아니라 심정을 연결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역사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합장하고 머리 숙여, 천상의 법도는 역사노정과 모순됨이 없다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승리의 개가를 아버지 앞에 돌려드림으로써 아버지께서 과연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심에 같이 기뻐할 수 있고, 내가 기뻐함에 사탄까지도 부끄러운 얼굴로 웃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일으킬 수 있는 아들 딸의 모습을 하늘은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그런 나를 찾아 헤매는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나를 재촉시킬 수 있는 선발대로 나서는 통일신도가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바라던 것은 너무나 적었사옵니다. 저희들이 귀중하게 여기고 존중시하던 것,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 데 그것을 넘어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의 은사 앞에 길을 막는 자신이었음을 탄식하는 마음이 이 시간 식구 식구에게 우러나게 하시옵소서. 이제 심정의 자극을 받고 사명감에 불타, 오라 하실 때에 기쁘게 오고, 가라 하실 때에 기쁘게 갈 줄 아는 사람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부르시는 음성을 고마와했거든 명령하시는 음성도 고마와하며 원수들의 진영을 향하여 돌진할 수 있는 하늘의 용자들이 되고, 하늘 세계의 주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는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자도 있을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런 마당에서도 패배하여 후퇴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행복에 잠겨 아버지와 의논하는 순간이 있는 반면에 싸움터에서 피눈물을 뿌리고 하늘의 원한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순간이 이 아들 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쁨도 책임지고 슬픔도 책임지고 싸움도 책임지고 억울함도 책임지고, 끝날의 심판대 앞에서 역사적인 것을 거부하고 '아버지시여, 손을 들어 저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를 보고 분함을 참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를 보고 고통과 억울함을 참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를 보고 수고를 거두시옵소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아들 딸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기를 6천년, 조심스럽게 찾아오시기를 6천년이셨으니, 아버지, 황공하고 망극하옵나이다. 찾으시는 그 시선, 찾으시는 그 모습, 조심스러운 그 발자취를 저희가 망각하였나이다.

오늘 들었사옵고, 이 시간 알았사옵니다. 조심스럽게 찾아오라고 하셨음을 아옵니다. 조심스럽게 찾아오신 아버지, 저희들을 붙들려 하신 그 손길을 몇 번이나 배반한 저희들이, 아버님의 체면을 망각하였던 자신들임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아버지 앞에 서고, 아버지와 인연된 생활을 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심히 찾아가야 할 길을 가게 해 주시옵소서. 이 길을 다 간 후에, 이 길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찾아갈 수 있는 방향을 가르쳐 주어야 할 저희들이온데, 그런 천적인 명령을 받은 저희들이 온데, 여기에서 슬픈 눈물을 흘리며 후퇴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배반하는 무리들을 사랑하고 배반하는 무리들을 축복해 주시려 하셨던 아버지의 심정이 분함으로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제 끝날에 엘리야가 기도하던 이상의 기도를 아버님께 드리며 나타나는 한분의 슬픔을 위로할 자가 없는 것을 알고 슬픈 조건을 넘어서, 그분을 권고할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찾아 헤매는 발걸음이 피곤하여 쓰러지고, 조심성 있게 찾아 헤매는 걸음이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때마다 아버님께서 '내가 있다, 내가 가는 길로 오너라' 하시던 그 때가 그립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믿고 일할 수 없었던 것을 알았사옵고, 인간과 의논하면 하늘의 일이 지연에 지연을 거듭했던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날 이때는 많은 무리가 필요치 않음을 아옵니다. 이때는 넘고 가야할 때요, 이때는 청산하고 가야할 때요, 이때는 모든 것을 맺고 넘어가야 할 때요, 이때는 있는 그대로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이 길은 불평하는 자 못 갈 길이요, 스스로 변명하는 자 못 갈 길이요, 스스로 자기를 세우는 자 후퇴할 길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길은 예수님이 피흘리며 가신 십자가의 길, 연장된 골고다의 길인 것을 알았기에 변명할 몸이로되 변명할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세워 자랑하고 싶으나 자랑할 줄 모르고, 분함을 알면서도 밟히며 가야 할 길임을 알았사옵니다. 6천년 섭리노정에서 이런 길을 걸어간 하늘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 원통하옵나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버지의 심정이 더 원통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회개해야 할 저희들이옵니다. 슬픔 중의 슬픔이요, 말할 수 없이 후회해야 할 사정인 줄 아옵니다. 저희 일체의 소원이 아버지 것이요, 저희의 일체가 아버지의 소유요, 저희의 심정과 사랑의 중심이 아버지시온데, 이러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불쌍한 자임을 아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런 아버지를 알고 붙드셨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던 그 늠름하고 여유 있는 인격이 그립사옵니다. 그 걸음이 그립사옵니다. 오늘도 내일도 역사의 변함과 생활의 변함과 자기 일신의 변함을 비웃을 수 있는 승리의 왕자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아버지, 그립고 그립습니다.

역사적인 주인공, 시대적인 주인공, 미래적인 주인공이 갈라질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로 나타나고 당신의 심정을 인간들에게 옮겨 줄 수 있는 그때, 그 세계, 그 동산이 그립사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되겠고 교단이 나와야 되겠사옵니다.

모든 것을 잊고 그것을 찾기에 준비하고 성심을 기울여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모든 것을 탕감하고 아버지 앞에 서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개의치 않고 달음질칠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삼천만 민족을 어이 하겠사옵니까. 이 땅 위에 널려 있는 27억 인류를 어이 하겠사옵니까?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고, 인류의 종말이 비운의 흑막에 싸여 있음을 바라보게 될 때 비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역사적인 슬픈 심정을 아는 연고로 무지한 인간들 앞에 이런 마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런 말을 하였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불충한 인간들로 하여금 불충의 자리를 피하게 하기 위해 이런 애절하고 비통한 심정을 전하오니 용납하여 주시옵고, 이런 기도를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의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서글픔이 역사적인 서글픔인 것을 알고 있사옵고, 갈보리 산정에서 피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이 그립사옵니다. 이제 그의 대신자, 아버지의 실체로서 역사를 비웃고 역사를 책망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인류는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하늘도 고대하고 계심을 아옵니다. 그러한 자체가 그리워 오늘도 내일도 찾아 헤매는 아들 딸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갈 길을 다 가지 못하고 슬퍼하는 자들 되지 말게 허락해 주시옵고, 갈 길을 다 간 후에도 또 가고 싶어하고, 갈 길을 다 간 후에 찾아지는 기쁨을 마음에 품기 위하여 허덕이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야만 놀랍고 크신 섭리의 뜻 앞에 하나의 주춧돌이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워 알았사오니, 오늘도 내일도 이 뜻을 위하여 동원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의 세계도 이 뜻을 위하여 저희의 후손도 이 뜻을 위하여 동원되어야 하는 운세에 있사오니, 명령하여 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가겠나이다.

아버님! 아뢰고 싶은 저희의 모든 심정을 아시옵고, 기도하는 바를 이루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남아진 험한 길도 지켜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