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집: 끝날에 남아질 아버지의 참아들딸 1959년 07월 2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08 Search Speeches

끝날과 재림주

하나님이 지향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참을 통할 수 있는 자녀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 천주까지를 인연지어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복귀의 사명입니다. 이런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이 구원의 역사요, 섭리의 뜻이요, 천륜의 목적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들은 이때를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떠한 때냐? 참다운 아들딸이 나타나 온 천하를 천리법도에 따라 치리(治理)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아들딸이 나타나 역사적인 원한을 청산해 버리고, 슬픔과 고통의 역사를 종결짓고 기쁨과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한날, 이러한 분수령의 때, 분수령을 이루는 날이 바로 끝날인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누가 온다고 하였습니까? 성경은 밝히 말하였습니다. 주가 오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주는 누구시뇨. 재림예수입니다. 재림예수는 어떤 분일 것이뇨. 그는 만천하의 역사를 동원하여 하나님이 수고하신 끝에 찾아질, 하나님께서 `너는 영원무궁토록 내 마음 속에, 내 몸 속에, 내 지은 세계 속에 살 수 있는 아들이다'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분이 오시는 주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가셨습니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그것은 아들될 수 있는 주인의 현현과 더불어 딸이 될 수 있는 신부의 모습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 가지고 아들과 딸이 상봉하고, 찾아 나오시던 하나님과 아들딸이 상봉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있어서 참아들딸의 입장은 제한된 입장이 아니고 한계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그 날은 그 아들딸과 인연되어 있는 세계가 한꺼번에 동원하여 하늘을 찬양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는 날인 것입니다.

인류와 더불어 참아 나오시고, 인류와 더불어 슬퍼하시며, 인류와 더불어 싸워나오신 하나님 앞에, 인류가 고개 숙여 기도할 것이 무엇이뇨. `하늘이 세우고자 하는 참된 아들이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참된 아들은 어떠한 분인가. 그는 참된 아들인 동시에 참된 신랑의 자격을 갖추어 참된 신부를 찾고 참된 인류의 부모가 되어야 할 분입니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인간들을 이끌어 그 참된 아들딸과 접붙이기 위해 섭리해 나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역사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너희는 양자의 영(靈)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했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양자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제아무리 잘 믿는다고 할지라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늘 앞에 양자밖에 안 됩니다. 하늘의 아들이 있다 할진대 그 아들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고. 아들 아닌 사람이 있고 양자가 있고 참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도 그렇지 않아요. 내 아들이 아닌 남의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을때 대신 다리 놓을 양자가 있고 참아들이 있습니다. 천지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땅은 선악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혼란이 벌어져 참도 참이 아닌것 같고 참 아닌 것이 참인 것 같이 엉클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늘은 참다운 아들을 찾고 딸을 찾지 위한 이념을 갖고, 또 그런 심정을 갖고 인간을 대하며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 참다운 아들딸이 누구입니까? 인간들은 모릅니다.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세계의 아들 아닌 자들을 양자의 모양으로 수습하여 이들을 다시 직계의 자녀로 종결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구원섭리역사입니다.

아들의 인연이라는 것은 혈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혈통이 직접 연해 있든가, 자기의 아버지나 선조의 혈통이 연해 있든가 어떠한 혈통적인 조건을 가진 입장에서만이 아들딸의 명사를 세울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하늘이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가 창조된 그날부터 하나님의 심정이 그들의 뼈골로 흘러 하나의 귀결점을 세우고, 그 이념의 전부도 아담 해와에게 화하였던들, 우리는 하나님의 직계혈통의 인연을 통할 수 있는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는 다른 혈통과 인연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들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혈통이 다르니 양자입니다, 양자. 아무리 섭리의 뜻을 위하여 지성을 다해도, 남의 자식을 끌어다가 잇는다 해도, 양자의 혈통을 이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복음을 세워 지금까지 섭리해온 신약 구원섭리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양자를 세워서 내 참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세상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고통과 억울함을 당한 사람이 심정에 어린 말씀을 한다 할지라도 그 심정을 통하는 입장에 서지 못한 사람은 `그럴 것이다' 하는 정도밖에 모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겠지'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긴 무얼 그래?'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여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어떠한 인연권에 있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심정에 슬픔이 스며들 때 그 말을 듣고도 심정에 슬픔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야만 같은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