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집: 부인전도대원의 책임 1970년 08월 2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93 Search Speeches

아벨의 책임과 가인의 책임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나오셨으니,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가져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뭘 할 것이냐? 종의 자식들을 끌어 올리는 역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대신 그런 역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창조 역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눈물과 피와 땀을 흘려야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여러분을 위해 수난의 역사를 거쳐오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 대신 그 역사의 슬픔을 중심삼고 종의 자식 앞에 온정성을 퍼부어야 됩니다. 종의 아들딸을 자기 아들딸보다 더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하기 전의 아담을 사랑하시던 기준보다도, 아벨이 가인을 사랑하는 기준이 더 높아야 됩니다. 있는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 됩니다. 이때는 형제로서의 가인과 아벨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가인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종적으로 올라가는 종적 관계입니다. 이때는 아직 횡적 관계가 아닙니다. 가인이 그 기대 위에서 아벨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생활이 같아야 되고 심정이 같아야 됩니다. 그리고 소망도 일치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아벨은 가인을 그 기준까지 키워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과는 심정일치, 생활일치, 소원일치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아벨은 그렇게 일치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인을 키워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인이 아벨과 그렇게 안 되어 있다 할 때는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나를 닮아라. 나를 닮아라'해 가지고 같은 혈육의 정이 통할 수 있게끔 가인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와 나는 죽더라도 하늘편이다. 죽음길이 가로막혀 있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됩니다. '당신이 가는 데는 나도 가고, 당신이 죽을 자리에 있으면 내가 대신 죽겠다'고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인이 죽을 자리에 있을 때 아벨이 대신 죽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하고, 아벨이 죽을 자리에 있으면 가인이 대신 죽겠다고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당신의 목적과 당신의 소원과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입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전부다 물려받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은 그 모든 심정도 내 것이요,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도 내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기준까지 올라간 아들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아벨과 가인이 하나되어 비로소 부모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의 복귀역사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횡적 기반이 닦여지느냐?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횡적 기반이 닦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참부모를 통해서 가야 합니다. 이렇듯 완전히 하나된 그 자리를 중심삼고 주님인 참부모가 올 때까지 끌고 나온 역사가 기독교 역사입니다. 영적인 기독교 역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육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형제의 인연을 결속시켜야 합니다. 심정을 통일시키고 행동을 통일시키고 소원을 통일시킨, 같은 형제의 기반 위에서 '죽더라도 내가 먼저 죽지 아벨을 죽여서는 안 되겠다'고 할수 있는 자리,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가인을 기르는 기간이 얼마인가? 7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무엇이었느냐 하면 세계적인 아벨적 아들을 찾아 나오는 역사였습니다. 즉, 메시아를 찾아 나오는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벨적인 아들을 찾아 나오는 노정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