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집: 이렇듯 예수는 우리를 찾으신다 1956년 05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2 Search Speeches

고통의 예수

예수님 당시에는 말씀을 전하는데도 남 몰래 전해야 했고, 말씀을 듣는 데도 숨어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가는 곳이 광야였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는 수많은 군중을 광야로 끌고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듯이 예수가 생활과정에서 뭇 무리에게 복음을 전파했으나 그것을 환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가 부여받은 사명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고하면 할수록 그것에 대하여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자가 많았다는 거예요.

이런 것을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뭇 무리를 대하여 광야에서 외치시던 애처로운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시 하늘 앞에 호소하기 위하여 감람산의 험한 길을 찾아들어 갔습니다. 따르는 제자들은 흩어지고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받고 다시 제 2차로 사탄과 싸울 수 있는 힘을 보충하기 위한 예수의 수고를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0여년의 평생을 불태워서 고통 중의 고통스런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고통이 30여년의 생애의 고통에서 끝난 것으로 아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오늘 저 나라 영계에 가서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 속에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역사가 연장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하나의 목적을 두고 섭리의 뜻을 대행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이 시간까지도 고통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의 생활이 연결되어 오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의 고통을 어디 가서 해결할 것인가. 오늘날 이 땅 만상이 아닙니다. 이 땅의 만상은 절대 아닙니다. 오늘을 책임질 수 있는 여러분을 통하여 그 고통과 수고 속에서 맺힌 한을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영생섭리노정에서의 고통을 여러분 앞에 역사적인 거리를 개의치 않고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실을 알진대 여러분 자체들은 예수의 고통스런 손을 붙들고 위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증오받고 욕을 먹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무친 원한을 대신 짊어지고 위로해야 할 책임이 오늘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서지 못했을 진대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러분의 환경에서 예수의 고난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생활을 분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무슨 죄가 있었기에 30여 평생의 고난의 생활, 고통의 생활을 해야만 했었는가. 죄가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 만민을 구원해야 하는 구주로 세움을 받은 죄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예수가 만민을 위하여 괴로워하고. 만민을 위하여 애타게 부르짖었던 사연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예수를 대하여 오늘 우리들은 회개의 마음이라도 가져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30여년 생애의 고난의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거두어야 할진대, 마굿간에서 태어날 때의 고난에서부터 골고다 산상까지의 고난, 그리고 부활 이후 2천년의 고난의 자국까지도 몽땅 거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뜻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슬픔은 애타게 부르짖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수고의 생애를 거쳐서도 끝나지 않았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가 고난의 생애를 거쳐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슬픔이 끝난 줄 알고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뜻이 연장되어 예수의 슬픔은 풀래야 풀 수 없는 한으로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여러분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를 슬픔에서 구해야 되겠습니다.

이렇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찾기 위하여 6천년 역사가 지난 오늘 날까지 수고하고 원한에 사무친 길을 갔으니, 생명을 내어 놓고 십자가의 길을 갔으니, 여러분은 그러한 예수를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30여년의 평생을 종결짓는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나아가 죽게 될때 죽으면서도 "아바 아버지여……."라고 애타게 호소하였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한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부르짖던 피의 호소가 이스라엘민족으로 인하여 해원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이스라엘민족이 해원하지 못했으니 그 선조들의 피의 호소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 것인가. 보답할 도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을 대신하여 역사적인 피의 호소의 대가를 치르고 탕감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아벨의 피가 호소할 때에 보혈을 흘리신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찢기고 피묻은 땅을 대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대하여 호소하던 조건이 예수로 인하여 해원된 것입니다. 4천년 동안 호소하던 울음 소리가,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피어린 호소의 목적이 예수 일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또 죽은 후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땅 위에 피를 뿌리고 간 선조들의 원한이 거두어진 연고로 그들이 땅을 대하여 원망하고, 해원을 요구하던 뜻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때에야 비로소 예수를 앞장 세워 하늘 앞에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