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집: 아버님의 슬픔 1972년 08월 0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2 Search Speeches

이 세계가 갈 수 있" 새로운 방안은 "시아를 찾" 것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를 두고 보면, 이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상, 그걸 중심삼고 볼 때 그 이상은 어디서 실현될 것이냐? 오늘날 여러분이 살고 있는 가정이냐?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대한민국이냐? 아닙니다. 혹은 선진국이냐? 그거 아니라구요. 이걸 크게 부정해서 초월할 수 있는 운동이 어디서 나오겠느냐 하는 문제가…. 이것을 완전히 부정해 놓고도 거기에 행복한 것을 밀고 나와 가지고 '너의 행복이 무엇이냐? 너의 힘이 무엇이냐?' 하는 이상의, 완전부정권내에 서 가지고도 그 이상의 것을 능가할 수 있는 내용을 들고 나오는, 신을 위주한 새로운 운동에서만 그것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타락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된다면 여기에서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부정해야 돼요. 개인 부정, 가정 부정, 종족 부정, 민족 부정, 국가 부정, 세계 부정을 해 놓고도 그 이상의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신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소원과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사랑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여기서 비로소 이 세계가 갈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바랄 수 있지, 그냥 이대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만큼 끌고 나온 하나님을 볼 때, 여기에 이러한 숨막히는 장면, 즉 그야말로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흥망성쇠가 한 행동에 좌우될 수 있는 경각에 임하면 임할수록 하나님이 계시는 한 여기에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를 들면, 사랑하는 자식이 지금 물에 빠져 떠내려간다고 하면 그 부모는 무슨 힘이 없어서 그렇지, 힘이 있다면 비상수단으로 그물을 치든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을 빠진 그 사람은 모를 겁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여보시오,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해 가지고 그물을 쳐 주소!' 하고 지시해 가지고 그럴 수 있어요? 그 자체에 급급한 것입니다. 옆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어떠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물을 치는 놀음을 할 것이 아니냐. 역사의 종말의 비참함이 탄식과 절망으로 귀결되어 인류 앞에 찾아오면 그 절망과 비참의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은 모르지만 이것을 방비할 수 있는 표어와 혹은 준비와 예고를,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해왔을 것이 아니냐? 그것이 예언자들을 통한 예언임을 우리는 여기서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메시아가 와야 됩니다. 메시아 사상은 지극히 고마운 사상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류도 비참하지만 그 정경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어떨 것이냐? 숨막히는 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구할 것이냐? 한꺼번에 세계를 몽땅 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으로부터 구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 땅 위에 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분과 그분을 볼 수 없는 인간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인연을 갖고 오시는 분이 메시아요, 그 사상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종교를 보면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메시아 사상이 없는 종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종교는 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을 우리는 내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