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집: 추억과 회상 1969년 08월 1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91 Search Speeches

재림주님을 위한 복'교의 정성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면서부터 30여년의 생애를 지내기까지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슬픈 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홀로 느끼신 고독함과 억울함과 비참함은,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도 모르고, 역사과정의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비참한 사연을 품고 가셨던 예수님의 생애를 재현시켜 그 당대에 하지 못했던 것을 전부 탕감복귀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섭리의 입장을 중심삼고 준비시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요셉 가정의 모든 슬픈 사연을 중심삼고 복중교인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시는 주님이 한 살부터 30세까지 사흘에 한 번씩 갈아 입을 수 있는 옷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심을 받아야 했고, 하나님 앞에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사명을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복중교를 중심삼고 이스라엘의 승리적 입장을 재생하여 그 일을 다시 추진시켰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정성들였던 그 정성의 정도를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정성들이는 데는 양식으로부터 한식까지 전반적인 의식을 중심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30여년 동안 뜻을 품고하지 못하였던 모든 한맺힌 내용을 그들이 전부다 해원성사해야 할 입장에서 탕감역사를 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감옥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영계로부터 일본이 망할 날짜까지 받고서 `일본 천황은 망한다. 일본은 꼭 망한다' 라고 외치며, 감옥의 쇠사슬에 매여 있으면서도 생명을 내걸고 싸우는 모습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시대의 주권 앞에서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철창에 갇힌 영어의 몸이 되었다 할지라도, 시대의 모든 환경을 초월하고 일심으로 하나님이 남기신 복귀의 뜻만을 위하여 정성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들은 왜정 때부터 그런 싸움을 거듭하면서 준비해 나온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이 땅 위에 자기들이 소망하던 주님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고 김일성이 새로운 공산당 정권을 세우게 되자 그때부터 그들은 공산당 앞에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종교라는 미명을 내세워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수많은 대중을 착취했다는 죄목을 그들에게 뒤집어씌웠던 것입니다.

1946년 6월, 공산당은 북한 전역에 있어서 새로운 종교 단체에 대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에 유사한 단체가 있으면 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에 선생님은 경창리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왜 남한에 있다가 이북으로 갔느냐? 그 당시 한국의 신앙의 중심지가 평양이었고, 또 거기에서 그때까지 역사적인 신앙의 모든 투쟁이 엮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늘이 준비해 놓은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이북에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8월 11일에 공산당에 의해 대동보안서에 잡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허호빈이라는 분은 일평생동안 모든 정성을 다 들여서 그 길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그 배후의 역사를 보게 되면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종교인을 원수와 같이 취급하는 공산당의 압제하에서 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기들의 신앙심을 지켜 나갔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 고문받은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그들이 모시 적삼을 입은 그 위에 매를 얼마나 맞았는지 그 옷에 온통 구멍이 뚫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절을 수십번이나 하고 그의 동생은 고문에 못견디어 죽어 갔습니다. 그 전체의 책임자들 40여명도 투옥되어 가지고 비참한 가운데서 고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도 그러한 입장에서 같은 단체취급을 받아 가지고 투옥되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그때 수사를 담당했던 흥이라는 사람과 그 일 전체를 책임지고 지도하던 박찬정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도 어느 한때가 되면 다 만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원한이 맺혀 있는 통일교회인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초창기 핍박받던 당시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때부터의 통일교회는 알지만 들어오기 전의 내용은 모르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는 언제나 그렇게 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들어오는 통일교인들은 과거의 통일교회를 모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적인 문제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