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집: 수난의 정상 1977년 06월 26일, 미국 Page #34 Search Speeches

고통의 절정-서 복귀섭리를 하시" 하나님

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제일 고통스러운 자리, 제일 고난의 절정의 자리에 서게 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아담 해와의 타락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우리 인간들은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들이 타락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의 연결이 벌어진다구요. 그 타락한 아담 해와 자신들을 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결국은 부모로부터 끊겨 나가는 것은 육적인 고통이요. 마음적인 고통이요, 심정적인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개의 고통이 연결된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타락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떠나게 되었을 때,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고 몸부림쳤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인류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몸이 당하고, 마음이 당하고, 심정이 당한 고통은 역사적 고통의 출발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자.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다음엔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신, 자기 몸. 자신의 실체적인 무대가 되어야 할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몸 자체가 끊어져 나갔다 이거예요. 그다음에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침해를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타락의 자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잃어버린 자리요, 하나님의 몸이 침해를 받는 자리요, 하나님의 사랑이 침해를 받는 자리라는 거예요. 결국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하나님의 몸이요, 하나님 사랑의 실천적 무대였다는 거예요. 즉, 실천적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타락은 자기의 아들을 잃어버리는 자리에 처하는 것이요, 그다음엔 부모의 입장을 잃어버리는 자리에 처하는 것이요, 그다음엔 부부의 입장이 파탄당하는 자리에 처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는 그런 것을 다 몰랐다구요. 잘 몰랐다 이거예요. 그냥 떨어지는 단계에서 하나님의 품, 부모의 품에서 떠나니 몸적 고통, 마음적 고통, 심정적 고통은 그저 느꼈을는지 모르지만 이런 전체적 고통의 자리에는 미달하였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타락한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적 고통의 자리, 그야말로 인간이 체휼하지 못하고 인간이 도달하지 못하는 가운데 심정에 미쳐지는 고난의 자리라는 것은 최고의 절정이 아니었겠느냐는 거예요.

이것을 파탄당했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부터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타락된 하나님의 고난의 절정을 넘어갈 수 있는 자리를 모색해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의 고통의 근원을 해소시킬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구요.

자, 그것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느냐?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면 관념적으로는 느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실제의 입장을 어떻게 여러분 자신이 체휼하느냐 이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부인이 있는데. 그 부인이 말이예요, 아들딸을 잃어버리고 남편을 잃어버리고 부모를 잃어버렸다 이거예요. 그다음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가정하자구요. 그럴 때 어떻겠느냐 이거예요. 그때의 그 여인의 상이, 여인의 모습이 어떻겠느냐? 지금 우리 타락한 인간권 내에서 심정이 찢길대로 찢기고, 모든 것이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여인 자체로서도 비참한 것인데, 이런 심정의 고통을 느끼지 않은 순결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타격이 미치게 되었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어요? 어떠했을까요? 오늘날 자살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만큼 고통스러웠을까요?

자, 이렇게 볼 때 고통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이외에 딴 사람은 할 수 없다구요. 이런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최고의 고통의 절정에서 구원섭리, 복귀섭리를 하시는 분이 아니냐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